중앙아시아의 위대한 고려인들

그들 뒤에는 교육과 신앙이 있었다

편집인 | 입력 : 2026/07/10 [01:40] | 조회수: 67

고려인들이 1937년 강제 이주되기 전에 이미 강제처형은 시작되었다. 1937년 고려인들이 이주하기 전에 스탈린은 고려인들을 2500여명을 처형했다. 강제처형은 강제이주의 전초적 사건이다.  그 중의 한명이 조명희이다. 

 

디아스포라 문학선고자구자인 문학가 조명희도 이 때 숙청당했다. 그는 충북 진천 출신으로 도쿄 토요대학 철학과 출신으로 '낙동강'이라는 대작을 쓴 사람이다. 

 

 

  

 

 진천, 조명희 문학과

 

조명희는 반체제 문학활동으로 인한 일제의 탄압으로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했다.

망명 첫 해에 대표적인 저항시 작품인 「Растоптанная Корея(짓밟힌 고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1934년에 알렉산드르 파데예프(Александр Фадеев, 1901년 ~ 1956년)의 추천으로 소련작가동맹에 가입하였다. 

 

  

 

2500명 강제 사살

 

소련 당국은 강제이주 직전 고려인 지도급 인사 2,500명을 일본의 간첩, 또는 반혁명분자로 몰아 체포, 총살했는데 이때 김단야, 박진순 등 소련에서 활동하던 조선의 공산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들이 희생되었다. 이들은 공산당에 가입했던 인물이다. 심지어 스탈린은 한국 공산당까지 살해했다. 김단야는 이르크츠크 공산당원이었다. 

 

  

 

 레닌을 지지했던 박진순까지 살해당했다.

 

  레닌과 박진순

 

지도자들을 2500여 명이나 잃은 고려인들 17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떠났다. 이들은 대부분이 조선보다 연해주에서 태어난 1세들, 그들의 자녀들이 많았다.

 

연해주 이주는 1863년부터 1937년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주로 을사조약이후, 한일합병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다. 연해주 이주는 1910년 한일병합 이후와 1910년대 초반에 가장 크게 늘어났다. 조선은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야를 가나안으로 바꾼 민족  

 

  우슈토베

 

  드론으로 촬영한 우슈토베

 

  

 

70년 만에 연해주라는 타민족국가에서 성공한 고려인들은 조선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서구의 교육과 신앙을 맛보았다. 그 교육과 신앙의 힘으로 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성공을 했다. 그들은 다시 태어나 중앙아시아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연해주 교육의 힘은 강제이주된 중앙아시아에서 발휘되었다. 모세 한 명이 하나님을 만나 민족을 이끌었고 요셉 한 명이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힘으로 히브리 민족의 배고픔을 도와주었고, 다니엘과 에스더, 다윗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민족을 구원하였듯이 고려인들의 소수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만나 고려인들을 정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눈물과 한의 고려인들이 하나님의 힘으로 중앙아시아에 정착하고 2세, 3세 들이 그 곳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게오르그 바실레비치 

 

그는 1956년 카자흐스탄 출생으로 아바이 사범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해당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봉방학과 학과장, 철학역사학과장, 이달레트 법학교의 교수로도 근무했다. 2005년에는 카자흐스탄 기본프로그램 집필사업에도 참여했다. 2002년에는 카자흐스탄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게 니콜라이 데니소비치   

 

그는 1955년 카자흐스탄 크질 오르다에서 출생한 항일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의 후손으로 테니스 코치와 소련 역도선수권자 출신으로 크질오르다 농업생산엔지니어 대학교에서 체육학과 교수로서 활동했다. 1991년에는 역도 기술 교수및 기술적인 훈련법과 관련된 주제로 박사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기술교육 프로그램은 로시아, 오쿠라이나, 벨라루수, 몰도보 등 세게 여러나라에 판매가 되기도 했다. 

 

권 류드밀라 알렉산드로브나

 

그녀는 1931년에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에서 출생했고, 1957년 카자흐스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1957년부터 카자흐농업대학교 정치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녀는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고려인들'의 공동저자이기도 하고, 20편 이상의 단행물을 포함해서 총 50여편 이상 학술저작물을 남겼다.    

 

권 세르게이 승구비치

 

그는 1923년에 출생하여 1948년 모스크바 광산대학교를 졸업하고 소련 광산학 분야 전문가이고, 기술학 대박사(1971)였다. 1967년 카라간다 기술대학교 교수로 근무했다. 

 

김게르만 니콜라예비치 

 

1953년 카자흐스탄 우수토베에서 출생하여 역사학 대박사이며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공훈교수가 되었다. 1999녖에 한인이민사로박사학위를 받았고,  2000년에 교수지위를 받았다. 그는 한국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다. 

 

김게오르그 불라디미로비치

 

1953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출생했다. 그는 카자흐스탄 상원의원, 카바흐스탄 법무부 소장, 법률학 박사이다. 1990-1991년에는 카자흐스탄 대통령고문을 지냈고, 1992-1995년에는 카자흐스탄 헌법재판소 판사를 역임했고, 2002-2003년에는 법무부장관을 지냈다. 그는 카자흐스탄 공화국 검찰 명예일꾼 등의 메달을 수여받았다. 

 

김 림마 이바노브나

 

1946년에 우즈벡사회주의 타시겐트에서 출생하여 타시겐트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고려극장에서 활동했고, 러시아 예술대학교에서 예술대학교에서 발레안무 전공을 했고, 1982년 카자흐스탄에서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김 바실리 아니톨레비치

 

1950년 카자흐스탄 알마타에서 출생했고, 기술과학 교수이고, 카자흐스탄공화국의 국가상 수장자이다. 김바실리는 용광로 작업과정 이론분야와 고온실험 장비 분야에서 인정받는 학자이다.  그는 야금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110편 이상의 연구논문 및 자료와 2권의 연구 단행본, 10권의 저작권 및 특허가 등록되었다. 

 

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1922년 연해주에서 출생했고, 러시아에서 법학 박사를 받았고, 1957년 카자흐스탄에서 내부무의 공훈근로자로 칭호를 받았고, 1970년부터 카자흐스탄 경찰학교 부교장을 지내고, 1882년에는 소련법학과 학과장을 지냈다. 

 

연구물로는 북한의 국가구조(1955), 민족들의 사회주의로의 이동형식과 방법(1950) 등이 있다. 

 

이외에 각 분야에서 활동한 고려인 교수들이 수 십명이 넘고 경제인, 농업인, 의사, 예술가, 스포츠인 등 전문인들의 활동이 수 백명이 넘는다. 그들은 강제이주처를 가나안 복지로 만들었고 중앙아시아의 으뜸된 민족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강제이주자들에게 요셉과 다니엘이 있어서 1991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방화될 때까지 54년만에 중앙아이사에서 국가정치와 법, 경제를 좌지우지하였던 것이다. 50년 동안 기적을 창출하였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비롯, 축구선수, 감독, 경제에 있어서 최고의 사람들이 배출되었다. 

 

아리랑 민족은 어딜가나 하나님이 함께 했고(알이랑), 아리랑의 노래를 불렀다.  1914년 독일에 포로로 잡힌 러시아 정교도 고려인이 아리랑의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민족의 희망의 노래였다.  

 

 

고려인은 강제 이주 1-2년안에 약 2만 여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남은 15만 명 중에서 카자흐스탄에서 다니엘, 요셉같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카자흐스탄 상층부를 장악하였다. 알이랑 민족의 위대성이다. 

   

알이랑 민족의 지하예배의 신앙은 1991년 개방이 되면서 양성화된 교회를 통하여 드러났다.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고려인의 교회가 약 80여 개이며, 우즈베키스탄에는 100여 개의 고려인 교회가 있다. 음성화 되었던 신앙이 양성화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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