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러시아8)

연해주에서 선교활동

편집인 | 입력 : 2026/04/27 [19:04] | 조회수: 69

 

 

선교활동 

 

러시아에 이주한 후 조선인들은 1865년부터 정교회에 귀의하여 1910년에는 인구 30%에 해당하는 약 1만여명이 세례를 받는다. 

 

1863년 13명을 이끌고 러시아에 온 최초의 이민 지도자 최운국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1865년 1월 17일 발레리안 사제에 의하여 최초의 세례를 받는다. 

 

2년이 지나 1867년 지선허(티진헤)마을에는 17명의 한인 세례자들이 있었으며, 1869년에는 세례자수가 91명에 달했다. 

 

6년이 지난 1875년 남우수리스크의 한인마을의 세례자는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했다. 이주 한 지 12년만에 30%에 육박한다.

 

  한국외국어 대 이병조 교수

 

7년이 지난 1882년부터 1916년 시기 남우수리스크 지방 정교회 한인선교지구는 세례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1904년 한인 세례자는 8,664명으로 증가되고, 1910년후에는 한인정교도는 10,237명까지 불어나 한인 인구의 28.5%를 차지한다.  

 

"선교사업은 계속해서 수행되어 나갔다. 1904년 경 세례자 수는 8,664명으로 증가 되었고, 1903년경에 세례자 수는 60%에서 90%로, 교회 참여도는 40%에서 85% 로 증가할 정도로 세례자 수와 교회참여도는 증가추세를 보였다. 1910년 블라디 보스톡 주교구 정교선교협회 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한인정교도는 10,237명(남자 -5.955명, 여자-4.282명)으로, 전체 한인의 28.5%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명철에 의하여면 초기 한인들에게 정교회는 낯선 종교였지만 국적 획득이 토지소유와 연결이 되었고, 개종이 귀화의 조건이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한인이라면 종교성을 떠나서 러시아 땅에 정착하기 위하여 정교회 귀의했을 것이라고 했다.  

 

 

  

 

 

  

 

 

개신교 선교활동, 1909년 최관흘 목사 파송

 

이러한 상항이 되자 대한에수교장로회도 연해주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1909년에 최관흘이라는 목사를 파송한다. 

 

한국장로교회는 1909년 2회 졸업생이 8명 배출되자 다시 한석진 목사와 2회 졸업생 최관흘을 선택하여 일본 동경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선교사를 보낸다.

 

  

최관흘은 1909년 9월 6일에 선교사 파송이 결정되고, 바로 두 달 뒤 11월 5일에 블라디보스톡에서 행정기관에 장로교회를 세우겠다며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정교회의 교리

 

동방정교회도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니케아신경을 고백하여 삼위일체를 인정하고,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면에서 개신교와 같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카톨릭처럼 성만찬 및 예전, 의식을 중시하고, 마리아론에 있어서 수태고지 이후에는 원죄가 사라졌고, 화체설을 인정하고, 성상숭배등에 있어서 유사한 면을 갖고 있다. 특히 문자로 된 성경말씀과 그림으로 된 말씀(성상)을 동등시 하고 있다.   

 

  안양대 박사, 남명철

 

성상 

 

동방정교회에서 성상(Icon, 이콘)은 거룩한 인물이나 장면을 그린 성화(聖畵)로, 예배와 공경의 핵심 대상이다. 8-9세기 성상 파괴 운동을 거치며 입체 조각 대신 평면적인 이콘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고, 이는 천상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돕는 '말 없는 설교' 역할을 했다. 

 

 

  

 

  

 

사실상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거의 글을 읽고 쓸 줄을 몰라 정교회의 아이콘이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와 성경말씀을 읽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실학파  홍대용(1731-1783)은 성상을 보면서 예수의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성상은 문자이상의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정교회가 갈수록 부흥을 하니 조선장로교도 최관흘을 파송하기로 했다. 이미 그 이전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와 약 100여명의 장로교 신도가 있있다.  

  

  

 

장로교파가 선교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 이강을 중심으로 국민회 계열의 인물들도 장로교 신앙을 전도했고, 그 결과 1901년 블라디보스톡에는 신자가 100명에 달했다. 

 

  

 

최관흘이 정식으로 연해주지사에 예배를 볼 것을 청원했다. 

 

  

 

연주해주시는 조건부로 허락했다. 그러나 러시아정교회는 불허해줄 것을 요청한다. 

 

  

 

최관흘이 선교활동을 하자, 신도수가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블라디보스톡 300명, 우수리스크 100명, 하얼빈 200명, 기타 지역에서 200명이 있었다. 최관흘은 뛰어난 설교자였다. 

 

  

 

연해주 당국의 조건부 허가를 받은 장로교회는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정교회는 최관흘의 선교 활동을 방해하고 그를 추방하려 하면서 한편으로 그를 회유하여 정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려했다.

 

연해주에서 모든 선교사들과 권서인들이 추방되었을 때 최관흘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국가에 해를 끼치는 외국인이란 죄목으로 추방 명령을 받았다. 정교회는 교인을 뺏길가봐 최관흘목사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정교회사제의 요청에 의하여 최관훌목사는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정교회에 귀의하여 교리문답사 역할을 한다. 그는 복음을 전할 목적에서였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한국 교회는 그를 후원을 중단하면서, 철수 명령을 내렸고, 정교회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러시아 정교회 신부 오가이 봐실리를 통해 접근하여 마침내 정교회로 데려가게 된다.  

 

그러자 한국교단에서는 그를 면직했다. 러시아 선교사 정호상 목사는 "그가 러시아 정교회로 넘어 간 것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교에 동역자로 헌신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그의 선교 활동은 지상 교회가 아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려는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그의 진심을 복음을 전하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최관흘목사는 조선장로교회에서 복직되었다. 러시아가 1917년 사회주의화가 되지않았다면 미국의 캘리포니아처럼 한인들은 러시아에서 자리를 굳혔을 것이다. 공산국가의 출현은 한인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스탈린에 의해 1937년 강제 이주를 당함으로서 한인들은 자리잡으며 기득권을 누리며 살았는데 졸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죽고 가난뱅이가 되었다.  

 

악마 스탈린의 출현으로 예수그리스도가 패하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시련이 컸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에게는 1863년 이전의 시련보다 더 큰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때에 따라서 악한 영을 가진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앙을 져버리지 않는 민족은 언젠가 승리를 하는 법이다. 159년이 지났다.

 

러시아와 대한민국의 국민총생산이 거의 같아졌다. 대한민국은 IT강국이 되었고 문화강국이 되었다. 예수그리스도를 외치는 나라가 결국 승리하는 법이다.

 

우리는 연해주사건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붙잡고 나아가는 민족은 시련이 있어도 언젠가 승리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그리스도는 살아있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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