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러시아6)

정교회를 통한 개종

편집인 | 입력 : 2026/04/24 [23:25] | 조회수: 59

 

한인들이 기독교를 처음 접한 곳은 일본과 러시아였다. 일본에서는 천주교를 통해서, 러시아에서는 정교회를 통해서이다.

 

정교회와 천주교는 개신교와 다른 면이 있지만  모두 삼위일체 관련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을 수용하고, 예수의 신인성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칼케톤 신앙고백을 수용한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원죄가 없다며 신성시 하지만 정교회는 마리아를 신성시 하지 않는다. 두 종교는 모두 말씀보다는 의식 위주이다. 

 

 

 

 

일본에서의 조선 천주교도

 

1953년 한인들은 일제에 의해 임진란 침공을 받으면서 1593년부터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종군신부로 조선에 왔던 세스베데스 사제가 조선인들을 예수를 믿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1593년부터 일본에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나카사키에서 3백 여명의 조서인 남녀 노예들이 세례를 받았다." (알레자레데 발데리노 신부의 편지 1593)

 

  

 

 ...올해 2000명 이상의  조선인 세례를 받고 ...

            (빠시오 신부의 편지 1594년 10월)

 

  

 

1594년 나가사키와 토기츠 등에서 조선인 12,365명이 고해성사를 보았고, 900명이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 동반자들의 일본 선교의 역사', 루이스데 구스만)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이미 16세기말부터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당시의 관점에서 구교. 신교 나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조선인들은 적진에서 예수를 믿었지만 그 곳에서도 바로 교회건축을 하였다. 

 

조선인들이 최초로 예수를 알게 되어 그들은  일본땅에서 노동을 하여 조선인 교회를 개척하였다. 하와이 사탕수수 한인 노동자들이 교회를  설립한 것과 같다. 조선인들은 어디를 가나 교회부터 세웠다.

 

"나가사키에는 조선인 천주교인들이 많아 열성적으로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려 했다. 조선인들은 조금씩 돈을 모아 땅을 샀고, 비용이 부족해 작은 성당만 세워 순교자 성 로렌조에게 바쳤다." (예수회 일본 연례보고서, 1610년)

 

 

  

   

일본에서는 빈센트 권이라는 사제도 나왔다.  그는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당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관료의 아들( 빈센트 권)을 교육시키기 위해 일본의 신학교로 데려갔다.

  

 

러시아에서의 조선인 정교도

 

러시아에서도 조선인들은 정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심을 키워 나가면서 교회를 설립했다.

지선허 마을은 아무도 살지 않는 항량한 곳이었지만 점점 사람들이 많이 이주함에 따라 1865년부터는 정교회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나타나면서 20년만에 교회를 세우기도 한다. 

 

한국외국어 대학교 사학과 이병조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을 보자. 한인들의 러시아에서의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잘 나타난다. 

 

  

 

이 논문에서 1868년 베니아민 러시아 대주교에 의하면 한인들에 대한 선교활동은 이주를 시작한 때인 1865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29p.


1863년 13명을 이끌고 러시아에 온 최초의 이민 지도자 최운국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1865년 1월 17일 발레리안 사제에 의하여 최초의 세례를 받는다.

당시 지선허 마을을 방문하여 기행문을 남긴 프르줴발스키는 최운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48세의 이 촌장은 어눌하지만 러시아어를 구사했으며, 머리와 복장은 러시아식으로 하고, 심지어는 큰 러시아식 농가를 짓고 살았다. 그는 호기심이 아주 많고, 친절하고 정직했으며, 나를 안내해주는 이틀 동안 여러 차례 모스크바와 성-페테르부르그를 가보고싶다고 나에게 말했다." 

 

  

최운국은 2년 만에 러시아어를 터득하여 정교회 세례를 받는다.

 

베니아민 주교의 보고

 

1867년 베니아민 주교에 의하면 그 당시 지선허(티진헤)마을에는 17명의 한인 세례자들이 있었으며, 1869년에는 세례자수가 91명에 달했다고 보고한다.

이주한 지 6년만에 91명의 세례자가 있었다. 1871년에는 한 해 동안에  363명의 아이들이 세례를 받는다. 

"1867년 베니아민 대주교의 보고서에 따르면, 발레리안은 그 해 한인 10명과 이듬해에는 한인 4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869년 8월 발레리안은 사망한 자하리 티아 프킨 선교사를 대신해 남우수리스크 지방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얀치혜에서 한인 14명과 다른 마을에서 13명의 한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1869년에는 세례자 수가 크게 늘어 91명에 다다랐다."

 

  

 

정교회 설립 

 

점점 많은 세례자들이 생겨나자, 1882년 러시아선교협회 지원으로 연추(얀치헤)마을에는 목조교회가 세워지는 착공식이 열렸다.

1883년에는 헌당식이 치러진다. 이주한 지 20년만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얀치혜 마을에는 최초의 목조교회가 세워지며 한인사회의 정교 중심지로 부상되어 나갔다. 1882년 7월 말 블라고베쉔스크 정교선교협회 위원회( лаговещеннский Комитет Православного Миссионерского Общество)]] 원금으로 하얀치혜에서 목조교회 착공식이 있었다. 이때 교회의 건축 재료를 담당 한 것이 한인들이었다. 이 목조교회는 모스크바 수좌대주교 필립(MHTPOIIOJIHT OH JIHIII)과 이르쿠츠크 초대 주교인 인노켄티(H.KyJIUHIKH)를 기려 1883년 6월 9일 전(前) 캄차트카 주교인 마르티니안에 의해 헌당식이 치러졌다."

 

 

  

 

지방 16개 선교 지구 중 10개가 한인선교 지구

 

정교회는 1891년 포시에트 선교지구외에 새롭게 3개의 선교지구(티진헤, 아다미, 자라체)를 설립하도혹 허가했고, 1900년에 새로운 교회건축이 이루어진다.

1910년도 선교조직은 더욱 확대되었고, 프리아무르 지방 16개 선교 지구 중 10개가 한인선교 지구였다.  

  

"1910년대에 들어 블라디보스톡 주교구의 선교조직은 더 확대되었다. 1913년 블라디보스톡 정교선교협회 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프리아무르 지방은 16개 선교지구 가 있었으며, 이중 10개가 한인 선교지구(포시에트 지구-7개, 수이푼 지구-3개)였고, 나머지 6개는 타민족 선교지구(캄차트카-5개, 우드강 유역-1개)였다. 다음의 표는 1882-1916년 시기에 존재했던 10개 한인 선교지구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세례자는 전체 인구의 30%

 

1875년 남우수리스크의 한인마을의 세례자는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한다. 

이주 한 지 12년만에 30%에 육박한다. 호남선교도 교인 30%에 육박했다. 대한민국은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기독교에 열심이 있었다. 

 

  

 

1882-1916년 시기 남우수리스크 지방 정교회 한인선교지구는 세례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부흥하는 정교회 

 

1904년 한인 세례자는 8,664명으로 증가되고, 한인정교도는 10,237명까지 불어나 한인 인구의 82%를 차지한다.  

 

"선교사업은 계속해서 수행되어 나갔다. 1904년 경 세례자 수는 8,664명으로 증가 되었고, 1903년경에 세례자 수는 60%에서 90%로, 교회 참여도는 40%에서 85% 로 증가할 정도로 세례자 수와 교회참여도는 증가추세를 보였다. 1910년 블라디 보스톡 주교구 정교선교협회 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한인정교도는 10,237명(남자 -5.955명, 여자-4.282명)으로, 전체 한인의 28.5%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르크츠크의 한인들 

 

이병조 박사 논문에 의하면 러시아 문헌을 인용하여 이르크츠크에서는 비기독교인들조차 주교에게 축복을 받기 위하여 주교에게 다가왔다고 적고 있다.  

 

“베니아민이 탄 배가 포구에 닿자 모든 한인들이 부두에 나왔다. 먼저 기독교도들이, 이후에 비기독교도들이 축복을 받기 위해 주교에게 다가왔다.... 많은 한인들이 러시아식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더러는 마포로 된 흰색의 조선 민속의상을 입은 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베니아민 대주교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동부시베리아의 한인들 

 

한인들은 동부 시베리아인 이르크츠, 치타, 자바이칼까지 진출했다.  

 

  

 

 동부 시베리아 한인 교육생 이반 니(H.HH)


1910년 11월 1일 이르쿠츠크 교회의 교사양성학교 한인 교육생 이반 니(H.HH)는 당시 이민족 선교에 헌신해오던 이르쿠츠크 티혼(M.Tpon QKHA -ÃoHe6HH) 대주교에게, 세례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며 세례를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간절히 청원합니다. 저희 한인들은 성삼위일체 신앙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세례받을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저의 민족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기에 이르쿠츠크 선교회의 이후부터 한인들에게 정교신앙을 전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한인들의 세례와 관련해 조치를 취해줄 것을 간청합니다"

 

 

 

예프렘 쿠즈네초프 대사제의 활동

 

동부 시베리아인 이 곳에서는 예프렘 쿠즈네초프 대사제의 활동이 커서 한인선교가 활성화되었다. 

 

  

 

에프렘 대사제는 성경과 조국의 역사를 중시하여 한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에프렘은 1911년 12월 18일 치타 한인정교학교 개교식에서 “공부하는데 중요한 두 가지는, 첫째는 성경연구요, 둘째는 조국의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애국심이 풍부하면....내일은 안락한 땅에 나갈 수 있으며 ”라고 하여 정교회를 통한 민족혼을 일깨워 많은 한인들이 정교회를 통하여 세례를 받았다.    

 

 

 

자바이칼 선교부의 한 교리문답서는 "한인들은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했으며, 특히 기독교적인 사랑과 협력을 볼 수 있었다"며 한인들의 믿음과 행실을 강조했다.

 

 

박페오드로


연해주에서는 박페오드로라는 사제가 양육되기도 했다.  그는 1910년 모스크바 목회자과정을 이수하고 1911년 사제가 되기도 했다. 

 

"연해주에서 한인 사제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 페오도르(中.H.Ilax)를 들 수 있다. 박페오도르 사제는 한때 블라고슬로벤노예 출신으로 자신이 태어난 곳의 교회 교구학교와 하바로프스크에서 가까운 오시포프카 지역의 교육부 산하 학교에서 2년간 교편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한 1908-9년에는 프리아무르 대군관구 본부의 조 선어 통역인으로 근무하며 러시아 정부와 관련을 맺기 시작했다. 

 

신앙에 깊은 뜻을 둔 박 페오도르는 1910년 신성종무원이 개설한 모스크바 목회자과 정(1910. 10. 5-1911. 4. 3)을 이수하고, 이듬해인 1911년 4월 블라디보스톡 포크 로프 교회의 사제로 서임되었다. 그는 이후 10월 1일자로 티진혜 선교지구의 책 임사제로 임명되어 수년간 한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한인들을 정교로 이끌었으며, 1916년 6월에는 다시 제항구 교회의 사제로 전임되어 한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정교 신앙을 전하는 등, 신세대 한인 사제로서 한인들의 정교신앙 입교 에 충실한 가교 역할을 했다.

 

  

 

  

 

이처럼 러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이 러시아정교회를 통하여 예수를 알게되고 기도를 하게 되며 사제가 양육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신앙심을 갖고 독립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신앙과 국가는 서로 연계 되었다.

 

강탁

 

조선에도 일제의 한일합방 후 1912년에 러시아정교회 한국인 첫 사제 강탁(1912년 서품)이 탄생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정교회를 통하여 예수를 알게 되었다.(계속)

 

 러시아 정교회 강탁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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