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러시아12)

사할린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편집인 | 입력 : 2026/05/08 [09:56] | 조회수: 174

 

 

 

사할린이주, 1870년대 이후

 

사할린에는 처음에는 연해주에 온 사람들 일부가 넘어가 살게되었다. 한국고전역사연구소 임용한 소장은 한인들이 사할린에 이주한 것은 1870년대에서 1880년대로 보고 있다.  

 

  

 

  

 

그 이후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에서 군수산업 부문의 노동력이 부족하자 1939년부터 모집의 형태로, 1942년부터는 관 알선 방식으로,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의 형태로 조선인들을 끌고 갔다.

이중징용(二重徵用)이란 강제동원이 이루어진 것도 이 때다. 남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이주시킨 것이다. 

 

사할린에 있는 군수공장으로 해상 연료운반사업이 어렵게 되자 일본 본토 내의 석탄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할린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 1만여 명을 다시 본토로 끌고 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할린 한인 이산가족이 생겼다. 1944년 8~9월에 걸쳐 이중징용된 3,200여명의 조선인들의 생사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북사할린과 남사할린

 

사할린은 북사할린과 남사할린으로 나뉜다. 북은 러시아가 남은 일본이 점령했다.

북한에 살았던 고려인들은 주로 연해주와 북사할린으로 가고, 남한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1939년 이후 일본에 의해 강제이동된 사람들을 말한다.

주로 경상도와 제주도 사람들이 70%이상이었다.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남한지방에서 온 사람들이다. 

 

  

 

  


사할린의 고려인(사할린 한인)은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간 사람들 이고, 연해주로 자발적으로 이주해 간 고려인들과는 다르다.

연해주 고려인은 주로 북한출신들이지만 사할린 고려인들은 남한 출신자들이다. 그들은 강제 징용되어 벌목과 탄광에서 일을 했다. 

 

  

 

1990년 4월 29일 사할린의 교회 창립

 

사할린에는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의 혁명으로 1992년에 자유가 찾아왔다. 그래서 1991년부터 한인 선교사들이 들어가 교회를 세웠다. 1907년의 최관흘 선교사가 총회파송으로 선교사로 들어간 이후 83년 만이다. 

 

사할린 한인교회는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한인 동포들이 1990년 소련의 개방 정책(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설립한 사할린교회가 시초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합동교단 이종렬목사가 1990년 4월 29일 사할린으로 가서 사할린교회를 세웠다. 

 

“초대 담임목사이신 고 이종렬 목사님이 소련선교회 멤버이셨어요. 1990년에 소련이 개방됐을 때 바로 사할린으로 가서 그곳 고려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유즈노사할린교회를 세우셨어요.

극동방송 라디오를 들으면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던 고려인들이었죠. 그 후로 사할린에 14개 교회를 세웠고, 러시아 대륙에도 19개 교회를 세웠습니다.”

 

  

 

공산당 기관지 '레닌의 길로''라는 신문도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싸할린에서 례배를 보고 있다"라는 글을 실었다. 

 

  



  

 

  

 

 

 

 

 

  

 

몇 십년만에 처음 헌물로 헌금을 드렸다. 달걀, 쌀을 헌물로 드렸다.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은 신도가 그동안 숨어서 극동방송을 통해서 신앙을 유지하다가 수 십년이 지나 입교를 했다. 

 

  


사할린은 1990년 이후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의 우동수 선교사같은 이도 1992년에 들어가 10여개 교회를 개척하여 신도 1,000여명이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15년 전에 교회를 세웠던 근거가 있어야 교회를 설립을 허락해 주겠다는 것이다. 우동수 선교사는 이 문제부터 해결을 해야 했다.   

 

  

 

그는 러시아정부로분터 교회설립허락을 이끌어 냈다.   

 

그가 개척한 10개의 교회가 이제는 40여 교회로 늘어나 사할린에 2개의 노회가 조직되었다.

다음 해에 신학교는 2개 학년으로 진행되어 1학년 40명(러시아인 15명), 2학년 25명(러시아인 10명)으로 65명이 공부하게 되었다.

 

러시아에서의 예수 부활

 

유즈노사할린스크교회는 장년 출석인원 150명이었고 학생, 유아 합쳐 100명으로 전체교인이 250명이었다.

그러나 1년 후에는 후임 목사님 가정이 전담 사역하므로 장년 350명, 주일학교 320명(유아부 20, 유년부 200, 소년부70, 청년부 30)으로 전체 교인 670명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이외에 다른교회들도 많이 세워졌다. 신앙의 봄이 러시아에도 찾아왔다.  

 

  

 

  



  



  

 

  

 

 

  

 

  

 

사할린 최초의 한인교회는 1921년에 설립

 

사할린은 1921년부터 교회가 세워졌다. 연해주에서 최관흘과 손정도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사할린으로 이주해 왔고, 그리고 한일합방이 되자, 일자리를 찾아 일본 본토로 건너간 기독교 한인들의 일부가 사할린에까지 와서 탄광과 제지공장으로 일하면서 교회를 세웠을 것이다. 

 

연해주에서 온 이들은 감리교의 손정도 목사와 장로교의 최관흘목사의 영향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였을 것이고, 일본을 통하여 온 사람들은 한국에 진출한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신앙을 가졌을 것이다. 추정컨대 사할린은 변방 중의 변방이라 소련 공산당 중앙정부의 통제가 미약했을 것이다. 

 

마카로프 교회

 

1934년 마까르보교회당사진을 볼 때 신도들은 공산치하에서도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카로프(러시아어: Мака́ров)는 러시아 사할린주 동부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6,567명(2018년 기준)이다.

 

유즈노사할린스크(사할린주의 주도)에서 북쪽으로 23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892년 신설되었으며 일본의 가라후토(사할린섬 남부) 통치 시기(1905년-1945년)에는 시루토루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공산치하시절인 1934년에도 마카로프 교회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약 20여 명이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었다.  

 

  


이미 러시아 공산혁명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한인들이 신앙생활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카로프는 제주인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던 곳으로 인구 1만도 안되는 소도시였다.  

 

  

 

  

 

  

 

이 곳은 한국관이 있기도 하다. 

 

  


이 곳에 공산치하에서도 신앙생활을 했던 한인들이 있었던 곳이다. 이종렬목사가 1990년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 한 신도는 어려서 세례를 받고 수십년이 지나서 입교를 하였는데 극동방송을 통하여 신앙생할을 유지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만 봐도 자식들도 모르게 숨죽이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옐친의 신종교법


고르바초프 이후 1997년 10월 1일에는 옐친이 서명한 신종교법이 등장하였다. 그 골자는 등록된지 15년이 되지 않은 교회들의 선교적 권리를 박탈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인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15년 전에 교회를 세웠다는 근거가 있어야 했다.

 

우동수 선교사의 회고록

 

15년 전이면 1982년으로서 공산정권시절 교회를 세웠다는 근거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근거가 없으면 교회설립을 허락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내용은 1992년에 사할린에 교회를 세운 우동수 선교사의 선교회고록에 나온다.  

 

  

 

 

마카로프 교회도 사진은 있지만 교회당을 세웠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었다. 그러나 연해주에서 사역하던 동료선교사들이 블라디보스톡에 소재한 연해주 고문서보관서에서 한국교회 러시아 선교의 자료를 찾는 수고를 감당하고 있었다.

 

연해주 국립 기록보관소

 

연해주 국립 기록보관소(State Archive of Primorsky Krai, 러시아어: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архив Приморского края, 줄여서 GAPK)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하며, 연해주 지역의 역사적, 행정적, 문화적 기록물을 보관하는 주요 기관이다.

 

특히 고려인과 관련 1920~40년대 러시아 한인사회의 강제이주와 한인과 관련한 자료가 남아있다. 그 내용은 마카로프에 한인들이 회집한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1928년 동경 경시청으로부터 유즈노 사할린스크시 경찰국에 전달된 비밀명령문건으로 마까로브와 우글레고르스크에 한인들이 회집하는 교회가 있으니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인들이 일본의 지배에 반역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감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연해주 국립 기록보관소

 

  


여기에서 1921년에 고려인 교회가 있었다는 자료를 찾아낸 것이다.

이 한장의 자료가 있어서 사할린에 약 40개의 장로교회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연해주 기록보관소 한 줄의 글이 사할린에 한국 장로교를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동수 선교사는 1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요약하면 아무리 사할린의 강추위와 강제노동이 일본의 제국주의 러시아의 공산치하에서도 한인들은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1863년 러시아 이주부터 러시아 정교회를 통하여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으며, 1909년 최관흘선교를 통해서 장로교 복음을 듣고, 신도들은 1921년 사할린에까지 가서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한인들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동통의, 사할린, 연해주에서까지 곳곳에 스며져 있었다.

 

예수그리스도의 힘은 1992년 사회주의를 무너뜨렸고 현재 사할린, 연해주에는 많은 한인교회들에 설립되어 지금도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매주일마다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80년이란 어두운 십자가의 터널이 있었지만 예수는 러시아에서 다시 부활하였다. 가는 곳마다 예수가 함께 하시니 한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민족의 정체성을 갖고 척토를 옥토로 만들었고 교회를 세워 신앙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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