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러시아7)

블라디보스톡으로 간 사람들

편집인 | 입력 : 2026/04/27 [16:39] | 조회수: 219

 

 

 

  


함경도에서 먹고 살기 힘든 농민들이 생사를 걸고 모세와 함께 홍해를 건너듯 두만강을 건넜다. 두만강을 건너면 가나안 땅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거기에는 바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는 거기에도 있었다. 율브린너는 러시아 바로의 상징에 불과했다. 

 

조선에서는 다른 나라로 불법으로 이주하는 사람에 대해서 참수형을 한다고 하였지만 1910년까지 1만 여명이 두만강 푸른 물을 건너 러시아로 이동했다. 겨울에는 언 강물을 디딛고 건너갔다.

 

  

 

  

 

 

 

그들은 황무한 땅을 가나안 땅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저푸른 초원위에 초가집도 지었다. 그러나 삶은 그림같지 않았다. 오직 가족과 함께 였다. 

 

 

 

당시의 조선인들의 모습이 사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서태지가 지선허 마을 기념비도 세워주었다.

 

  

 

  

 

연추

 

연추는 안중근이 단지동맹을 결성한 곳이다. 

단지동맹(斷指同盟)은 안중근과 항일의 뜻을 같이 하는 11명이 1909년 3월초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왼손 넷째 손가락(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 쓰며, 독립운동에의 헌신을 다짐한 일을 말한다.

 

  

 

  


많은 농민들은 단지동맹회원처럼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는 심정으로 연추마을에서 땅을 경작하여 옥토로 만들어 독립금자금을 만들었다. 

 

  

 

연추에는 이상설선생의 유허비가 있다. 

 

  

 

  


블라디보스톡

 

 

  

 

블라디보스톡은 우리가 잘 아는 영화 '십계'에서 바로역할을 한 율 브린너의 고향이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 영화배우가 되었지만 한민족들은 불법으로 이민한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평생 조선 바로의 노예 였다.  그들은 살기위해서 새로운 땅을 찾은 사람들이다.  

  

한인들은 1870년(고종 8)대부터 블라디보스토크(동방의 지배)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1886년(고종 24)에 400명이던 한인이 1891년(고종 29)에는 840여 명에 이르렀다. 5년만에 두 배로 늘어났다.

 

한인이 늘어나자, 1893년(고종 31)에 시의 행정 당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구역을 한인의 집단구역으로 설정하여 주었다.

이곳은 ‘카레이스키 스카야’, 즉 ‘고려인 거리(한인거리)'라는 공식 도로명이 붙여졌다.

 

개척리 

 

1870년초부터 고려인들은 1863년 지선허 마을에 이어, 연추마을에 정착하였지만 1875년부터는 블라디보스톡 개척리에서 보금자리를 폈다.

 

  

 

  

연추가 무장항쟁의 중심지였지만 블라디보스톡은 애국 계몽활동의 중심지였다. 학교, 신문사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조선인들은 대학교를 설립하여 후세들을 지적으로 육성하기도 했다.      

 

  

 

개척리는 ‘개체기’, ‘카레이스카야 슬라보트카’라고도 불렸다. 1870년대 군항 건설과 연해주 개발이 시작되면서 일자리를 찾아온 한인들이 시 광장 주변에 살았다.

1885년과 1892년 콜레라가 발생하자 시 당국은 한인 거주지를 아무르만에 접한 남쪽 언덕으로 옮겼다. 그것이 신한촌이다.  

  

신한촌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블라디보스톡에는 독립문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톡 극동대학 조명희 선생의 비석도 있다. 

 

  

 

  

언론사

 

블라디보스톡에는 연해주 1908년 2월에 창간한 최초의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사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신문이 바로 폐간되면서 다시 1908년에 대동공보를 발행하였다. 최재형이 모든 자금을 대었다. 

 

발행인의 명의를 러시아의 퇴역장성이며 변호사였던 미하일로프로 하여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 2회씩 발간하였다.

 

  

1908년 당시 러시아에는 한국인들의 이민이 크게 증가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하는 연해주에 한국인 수가 4만 5900명에 달하고 있었다.

 

배포는 러시아에 사는 교민사회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상해·미주·하와이·멕시코 등지에까지 발송되었고, 국내에도 비밀리에 우송되어 읽혔다.

 

교육기관 

 

블라디보스톡에는 한인을 위한 교육기관이 있었다. 최재형이 앞장서서 많은 재정을 투자했다.  35개 학교를 세우는데 막대한 재정을 퍼부었다. 

 

  

 

  

 

권업회 

 

블라디보스톡 권업회는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이종호, 김익용, 강택희, 엄인섭 등이 결성하였다.

 

 

 

초대 회장은 최재형, 부회장은 홍범도로 선임되었으며,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얻어 활동하였다. 권업회의 목적은 민족정신의 고취, 항일 독립운동의 전개, 교민의 단결과 지위 향상 등이었다.

 

권업회는 1913년 10월 2,600명, 1914년 8,579명으로 회원 수가 증가하였으며, 1914년에는 러시아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권업회의 전통은 1917년 결성된 전로한족중앙회로 이어졌다.

 

  


블라디보스톡의 의병활동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일제강점기 전 시기에 걸쳐 한인들의 치열한 항일 독립운동, 특히 의병 및 무장투쟁의 중심 기지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이주한 한인들은 이곳에 '신한촌' 등의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칠조약(군대 해산) 이후,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 지도자들과 민족 운동가들이 대거 연해주로 망명하여 항일 운동을 재개했다. 연추와 블라디보스톡은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신한촌(新韓村)은 1911년경 고려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언덕에 조성한 한인 마을로, 이곳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항일의병들은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여  1910년경 유인석(柳麟錫), 이상설(李相卨), 이범윤(李範允) 등이 주축이 되어 노령(러시아) 지역의 의병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십삼도의군을 결성하고,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유인석 비

 

블라디보스톡에서 의병활동을 한 사람은 이범윤, 유인석, 이상설, 홍범도, 안중근, 최재형 등이다. 

 

최재형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대부이자, 의병들을 지원하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의병운동의 물적 기반을 마련했고, 안중근은 1908년경 연해주 일대 의병부대인 동의회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홍범도는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 의병 투쟁을 주도했다. 

 

 

이외에 성명회(誠盟會)도 조직했다. 일제의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을 접한 뒤 유인석, 이상설 등이 신한촌 한인학교에서 한인대회를 열고 조직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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