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대는 죽은 신학의 사회

영감없는 성서신학, 성령없는 실천신학, 윤리없는 기독교윤리학

기독공보 | 입력 : 2018/07/18 [01:36] | 조회수: 1708

장신대에 순교자 주기철목사 기념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경건과 학문에서 인권과 학문, 기득권과 학문으로 변해가고 있다. 죽은 신학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를 중시하겠다는 것은 경건과 학문이 아니라 인권과 학문을 추구하겠다는 것이고 대형교회 담임목사로 가겠다는 것은 기득권과 학문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장신대가 경건과 학문 대신 인권, 기득권과 학문을 추구하는 이상, 장신대는 죽은 신학의 사회가 되었다. 일부 학생들이 거룩한 강단을 무지개 깃발로 물들이고, 교수들은 기득권만 찾아 떠나고 있는 것은 신학이 죽었기 때문이다.   

  

장신대는 죽은 신학의 사회

 

 

 

 

최근까지 장신대 교수로서 대형교회의 기득권을 찾아 떠난 교수들이 이수영, 김지철, 주승종, 배요한, 김경진 교수로서 5명이고, 분야별로는 조직신학자, 성서신학자, 실천신학자 등으로 다양하다. 서울대 출신이 2명, 장신대 출신이 3명이다. 신학이 죽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경건 대신 인권을 추구하고, 교수들은 주변보다는 중심의 기득권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중심은 주변으로 가야 하는데 중심은 더 큰 중심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수들은 학생들에게는 주변으로 향하라고 하고 있다.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필자의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http://lawtimes.net/789

 

 

 

주변신학 대신 중심신학

 

장신대 교수들은 주변신학을 해야 하는데 중심신학을 하고 있다. 이들은 교회를 맡아서 배가 부흥시킨 사람이 없고, 전세대들이 남겨놓은 것을 유지조차 하기 어려워 버겁게 목회하고 있다. 황금의 입도 없고, 사회를 향해 정의를 외치는 정의의 선지자 하나 없고, 현실 안주적이고 앵무새같은 소리를 하는 기득권의 입만 갖고 있다. 이들은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아골골짝 빈들은 가지 않고 예루살렘만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영감없는 성서학, 성령없는 실천신학    

 

이렇게 된 이유는 장신대에서 가르치는 성서신학은 영감설이 실종했고, 조직신학은 외국신학만 모방하고 한국영성과 정신이 실종했고, 실천신학은 제도와 형식만 남고 성령의 역사가 실종했고, 영성신학은 천주교 영성으로 전락했고, 기독교 윤리학은 성서의 윤리가 실종했고, 기독교교육은 성서의 교육정신이 실종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가 세습이나 동성애 같은 윤리적 문제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교수들은 교회법적인 의식없이 형이상학적인 신학이나 윤리적 의식, 기득권적 의식만 갖게 되었다. 

 

일부 교수들은 기득권신학, 일부 학생들은 인권신학

 

일부 교수들은 비기독교적 윤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거룩한 강단에 동성애 깃발이 휘날리는 것은 신학이 이미 실종했고, 교수들이 대형교회만을 선호하고 기웃기웃거리는 것 역시 신학이 실종했기 때문이다. 기득권신학만 수호하고 있을 뿐이다. 교수들은 영감없는 성서학과 경건없는 조직신학, 성령없는 실천신학을 토대로 세속화, 기득권신학을 추구하고 있다.

 

▲     © 기독공보

 

대부분 독일신학 모방

 

장신대의 경건성은 이미 신학을 통하여 사라진지 오래이다. 성서의 비평설은 이미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 보고 있고 영감이 사라진 독일신학을 흉내내고 있다. 성서의 영감을 중시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 레즈비언들까지 장신대를 찾아올 것이다.

 

현재의 장신대 성서신학과 조직신학, 기독교 윤리학적인 방법 갖고서 장신대의 세속화 흐름을 막을 수가 없다. 이미 신학이 영성과 경건을 상실한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장신대는 칼빈, 몰트만, 바르트, 온신학, 통전적 신학이외에 신학이 없다. 합동은 교리주의 신학, 기장은 민중신학, 기감은 토착화 신학이라도 있었지만 장신대는 특정신학 하나 없다.

 

학생은 인권을, 교수들은 기득권을

 

장신대 신학갖고서는 세속화의 물결을 이겨낼 수 없다. 장신대는 신학이 부재하거나 죽었다.  신학이 부재하다 보니 장로교정체성이 없고, 윤리와 어설픈 학문과 주장, 교리적 신학만 남는다. 학생은 인권을 추구하고 교수들은 기득권을 추구한다. 총회는 교단헌법보다는 다수의 총대들의 결의를 중시한다. 장신대는 경건과 학문이 학문과 경건으로 되었고, 총회는 법과 거룩보다 결의와 세속으로 되었다.   

 

사실상 성서의 비평설에 익숙한 학생들이 경건한 설교가나 유능한 설교가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경건과 학문이 아니라 학문과 경건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이나 성서신학이 독일의 신학의 일환이거나 어설픈 서구신학의 이식 때문에 한국교회도 서구교회처럼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장신대 출신 중에 유능한 설교가가 거의 없다.

 

영감을 상실한 성서신학

 

설교가가 없다는 것은 성서신학이 지나칠정도로 학문주의이거나 비평주의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장신대에서 성서신학을 공부하면서 영성과 영감성있는 성서를 체험하기는 어렵다. 학문을 중시하다 보니 경건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적인 신학자 하나 없다.

 

이러한 와중에 장신대의 동성애 사태는 이미 신학의 서구화로 인해 예측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유럽의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성공회, 미장로교, 미감리교. 미 개혁교단은 모두 동성애의 목사 안수를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독일신학이 판을 치는 장신대에서 동성애 문제가 불거진 것은  당연지사이다. 

 

경건과 학문은 인권과 경건으로

 

신학이 경건해 지지 않는 이상, 장신대의 모토는 경건과 학문이 아니라 인권과 학문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오늘 장신대가 이러한 사태가 되기까지는 무분별한 서구신학이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한국사회에 이식되다 보니 한국교회의 영성과 경건주의가 사라지고, 결국 학생들은 거룩한 강대상에까지 동성애의 깃발을 올리고 교수들은 거룩한 강단에 기득권의 깃발을 올렸다.  

 

 

학생들은 인권을 중시히고, 교수들은 윤리와 기득권만 중시하여 장신대는 점점 죽은 신학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은 신학의 사회 vs. 죽은 목회의 사회

출신학교, 논문 내용, 연구업적, 사역 교회, 연봉 등 교단사람들 알권리 있어

 

▲     © 기독공보

 

 

교단산하 교수들이 교단의 신학과 상관없는 교수들의 사적인 신학을 함으로 학교는 죽은 신학의 사회가 되었다. 교수들의 신학이 장로교 교단 신학과 상관없이 카톨릭, 초교파, 통일교옹호, 자유주의, 인본주의, 비성서주의 등으로 학문의 자유를 남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수들의 학문의 자유는 교단신학안에서의 자유이다. 직영신학대학에 속한 교수들이기 때문이다.

 

죽은 신학의 사회

 

직영신학교는 교단신학안에서 학문의 자유가 한정되어야 한다.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교수들은 직영신학대학밖으로 떠나야 한다. 직영신학대학교의 목적은 교단이 원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교수들의 신학을 보면 교단이 원하는 신학이 아니라 교수가 원하는 신학으로 전락했다. 교수가 원하는 신학을 하기위해서는 교단밖에서 교편을 잡아야 한다.  그 교수들이 원하는 신학은 현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즐기는 것이다.  

 

한 편의 신학이 되어야

 

교수들의 신학은 과거의 루터와 칼빈, 바르트, 몰트만, 불트만속에 머물러 그들의 입장만 소개하는데 그쳤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삶을 반영할 우리의 신학이 없었다. 죽은 신학의 사회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즉 현재를 즐겨야 하는 '카르페 디엠'이 없었다. 우리는 현재를 즐길 신학을 요구하는데 교수들은 전통과 과거, 중세세대, 종교개혁시대, 청교도시대, 미국개신교 시대, 독일신학의 과거신학만 즐기고 있었다. 

 

교수들은 현재 학생들과 목사 개개인이 한 편의 신학이 되도록 해야 했는데 과거의 신학만 가르치고 답습하는데 몰두하였다. 그러다 보니 불행하게도 학생들은 죽은 신학의 사회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산 신학의 사회는 모두 개개인이 한 편의 신학이 되어야 하는데 교수들만 신학이 었다.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이 신학이었고 교수들이 지시하는 것이 신학이었다. 우리의 신학은 없었다. 칼빈과 루터의 신학이 우리의 신학이었고, 바르트와 몰트만의 신학이 우리의 신학이었고 박형룡과 이종성의 신학이 우리의 신학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우리의 신학이 없었다.

 

근본주의가 우리의 신학이었고, 진보주의가 우리의 신학이었고, 에큐메니칼이 우리의 신학이었다. 틀에 박힌 신학함속에 우리가 신학이 되어야 하는데 교수들만 신학이 되었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너무 익숙해왔다.    

 

그러다 보니 과거 학자들의 신학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기철목사는 순교의 신학이 되었고, 손양원목사는 사랑의 신학이 되었고, 조용기목사는 삼박자의 신학이 되었고, 김삼환목사는 머슴신학이 되었고, 김진홍목사는 두레신학이 되었고, 전주안디옥 교회는 깡통신학이 되었다.  그들이 스스로 신학을 만들고 그 신학이 되었던 것이다.   

 

▲     © 법과 기독교

 

산 신학의 사회

 

불행하게도 우리는 한편의 신학이 되기 보다는 서구의 사대주의 신학, 앵무새 신학, 틀에 잡힌 신학, 교리신학, 근본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자유주의 신학, 비복음적인 신학, 바리새주의적인 정죄신학, 사두개적인 기득권신학의 노예가 되었다.

 

오늘 우리가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는 한편의 살아있는 신학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산 신학의 사회에 머물러야 하는데 과거의 죽은 신학의 사회에 머물렀던 것이다. 우리가 칼빈과 루터, 바르트, 몰트만, 벌콥, 박형룡의 신학에 머물러 있는 한, 죽은 신학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신학이 생동감 넘치지 못하고 현실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죽어가는 것이다. 산신학이라면 기독교가 죽을리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신학교육부는 교단이 원하는 산 신학을 하기 위하여 교수들의 신학, 연구업적, 외국박사학위, 연봉, 협력교회 등에 대해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필요가 있다. 교단안의 신학성에 대해서는 신학교육부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 제 11조 4항에 의하면 신학교육부는 "신학교육의 방침을 연구하며 산하 각 신학교를 감독한다" 고 되어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신학교를 감독하지 않고 직무유기를 해왔다.

 

각대학교수들이 천주교대학, 감리교대학, 성공회대학을 졸업하여 교단신학보다 교수신학을 더욱 강조한 것으로 되어왔다. 대부분 교수들의 신학이 교단신학과 상관없이 독일의 신학, 미국의 신학 등 서구의 신학이 학교강단에서 가르쳐지고 있었다.  창조적인 신학함없이 앵무새처럼 또 되뇌이고, 흉내내고, 모방하고, 이식하고, 교조화한다. 과거신학만 즐기는 것이다. 근본주의 신학에 머무르면 나와 다르면 다 이단이다. 에큐메니칼 신학에 머무르면 동성애인정 교단과도 교류한다. 진보주의신학이라면 비복음적이라도 연대한다. 죽은 신학의 사회에 머무르기 때문에 비복음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교수들이 죽은 신학의 사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신학교육부는 교단직영신학교 교수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필요가 있다. 교수들의 학위내용도 한글로 번역하여 10페이지 이상 제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산 기득권의 사회

 

교수들은 대부분 연봉이 5,000만원 이상 되고, 한 10년 근무하면 연봉이 1억에 상회하게 된다. 그 이외 각교회에 협력목사나 교육목사를 걸치고 있고, 나아가 설교, 강의를 통하여 2중, 3중의 사례를 받는 것으로 되어 1,000여명 신도가 있는 교회 담임목사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수들은 산 기득권의 사회에 머물고 있다.  교단에서 연봉이 1억을 상회하는 사람들로서 가장 특권층화 되었다. 

 

그러면서 교단의 록을 받고 있으면서 신학은 교단의 신학과는 동떨어진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장로교의 정서와 문화를 반영한 통합교단 신학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서구의 신학만 이식하는 사대주의적 신학이나 서구의 신학만을 흉내만 내는 앵무새 신학만 하고 있거나, 교단의 신앙고백과는 전혀 다른 비신앙적이거나 자유주의적, 로마카톨릭적인 비장로교신학이 가르쳐 지고 있다.

 

죽은 목회의 사회

 

현 교단의 상황은 교수들의 신학을 배우고 목회에 성공하기 어려운 죽은 목회의 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산 목회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수들의 정보를 데이타 베이스화 하고 그들에게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할 필요성이 있다. 안식년 대신 안쉴년으로 대치하여 미자립교회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학은 삶이다. 삶이 없는 신학은 죽은 신학이다. 그러다 보니 교수들이 죽은 신학의 사회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생동감 넘치는 신학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죽은 신학이 되고 만 것이다. 신학을 배울수록 영적으로 메말라 가는 것이다. 신학이 살아있는 학문이어야 하는데 영이 없는 죽은 신학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두 죽은 신학의 사회에 살고 있기때문에  죽은 설교의 사회, 죽은 목회의 사회, 죽은 노회의 사회, 죽은 총회의 사회, 죽은 교단의 사회, 죽은 기독교의 사회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론이 죽으면 실천이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단은 죽은 신학의 사회에 살고 있는 교수들이 무엇을 가르치는 지, 어디서 실천사역을 하는지, 대형교회만 기웃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차하면 대형교회 자리가 나오면 교수를 사임할 의사가 없는지, 학교에서의 연구나 강의보다는 사례를 많이 주는 교회 설교나 교회강의에만 기웃거리지는 않는지, 교단헌법에 벗어난 천주교나 비장로교신학을 가르치거나 연구하지는 않는지, 즉 죽은 신학의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는 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단 신학교육부는 장신대, 호신대, 한일장신대, 영남신대, 부산장신대, 대전신대, 서울장신대 교수들의 정보를 데이타베이스화하여 교단관계자라면 누구든지 교수들의 연구업적과 신학사상, 사역교회, 연봉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데이타베이스를 만들어 교수들이 항시 자신들의 연구업적물을 게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수들이 죽은 신학의 사회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이다. 

 

현재 직영신학대학 교수들은 학문성을 중시하면서도 해외저널에는 논문을 기고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하다못해 아시아 저널에도 논문게재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성명서 발표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교수 카르텔을 형성한다. 따라서 앞으로 교수들의 출신학교, 보직, 지위, 박사학위 내용, 연구업적물, 사역교회, 강사청빙 교회, 연봉 등이 투명하게 공개될 필요가 있다. 일부 교수들은 죽은 신학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산기득권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신학의 사회'에서 벗어나 '산 신학의 사회'가 될 필요성

 

한 신학교육부원은 조만간 교수들의 정보를 데이타 베이스화하여 교단신학에 일치시키기 위해 교수들의 신학을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현재 교수들은 민중신학, 통일교옹호신학, 천주교옹호신학, 자유주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연구한 학자들이 일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단도 이제 '죽은 신학의 사회'에서 벗어나 '산 신학의 사회'가 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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