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실크로드5)

천수의 맥적굴

편집인 | 입력 : 2024/10/26 [05:38] | 조회수: 345

천수

 

천수는 장안에서 서방으로 가는 비단길의 중요거점이 됐다. 천수는 또한 위하(渭河) 강가에 위치한 탓으로 농산물이 집산됐고, 황하유역과 접속된 교통의 요지였다. 

 

천수라는 이름은 기원전 114년, 한무제 때 천지가 진동하며 땅의  갈라진 곳에 하늘에서 물이 내려와서 호수가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당, 송, 명, 청때는 모두 진주라고 하였다.  

 

천수를 기반으로 성장한 진은 주(周)나라가 동천한 장안 부근의 역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후 서안 일대 관중평야의 경제적 부강에 힘입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인지 당나라 때 천수에 진주(秦州)가 설치됐다. 실크로드 상의 중요한 거점 도시였음은 물론이다.

 

 

 

천수는 복희의 고향


현재는 약 380만의 대도시로 성장한 도시로서 천수시 주민은 대부분 한족이다. 이 도시는 중국 고대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중국 삼황오제중의 한 사람인 복희의 고향이다. 

 

전설에서 복희는 인류에게 닥친 대홍수 시절에 표주박 속에 들어가 있던 덕분에 되살아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로 복희라고 했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기원전 2800년 무렵에 살았다고 전한다. 그는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있다고 하며, 다른 전설에는 용의 몸이라고도 한다.

 

  


천수에는 복희씨의 묘가 있기도 하다. 

 

  

 

  


복희는 8괘를 만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복희묘에는 태극관이 있기도 하다. 

 

  

 

한국의 태극기는 여기서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복희는 한국과 관련이 있기도 하다. 이러한 복희는 인류문명의 조상으로서 백성들에게 어업, 수렵, 농업등과 불의 사용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중국인들이  하나님대신 복희라는 사람을 인류문명의 시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천수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다. 이 곳은 문명의 창시자인 복희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지만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秦)이 발상한 곳이기도 하다.  

 

 

오늘의 차이나는 진에서 유래한다. 그만큼 진나라는 중국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진(秦, 기원전 900년경 ~ 기원전 206년)은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로,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원수를 황제로 지칭한 제국이다.

 

본래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하나였던 진나라는 기원전 4세기쯤 전국 시대 때 법가에 따른 개혁에 의해 급속도로 강성해졌고, 기원전 221년에 진 시황제에 의해 전국 시대를 통일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가 되었다.

 

진나라의 지배기간 동안, 중국에서는 무역이 증가하였고 농업이 발전되었으며 치안이 강화되었다. 또한 토지 지주제를 폐지하여 중앙정부가 국민들을 직접 통치할 수 있었다.

 

진시황(秦始皇)은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 병마용갱과 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들을 벌였으며, 화폐, 도량형 등을 통일하며 중국을 단일한 문화권으로 묶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진시황의 무덤은 30미터 지하에 있었다. 

 

  

 

 

 

  아방궁


진시황릉은 당시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의 모양을 본따서 만들어졌는데,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 있다. 외성의 둘레는 6.3km이고, 내성의 둘레는 2.5km이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산은 당시 내성이었던 부분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관이 안치되어 있는 매장실과 기타 부장품들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다.

 

관이 들어있는 매장실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기에, 현재 중국 고고학계가 주로 발굴, 조사하는 곳은 진시황릉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외성과 내성 부분이다.

 

또한 무덤 동쪽에 있는 병마용 또한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기에 이 유물들만을 조사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한다. 병마용은 진시황을 사후세계에서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다.

 

 

  진시황릉

 

 

 병마용갱

 

 


다음의 영상(EBS 다큐멘타리)을 보면 진시황의 거대한 지하도시에 대해서 잘 나타난다. 

 

 

군사력 역시 발전하여, 전술이나 무기, 운송체계 등이 발전하게 되었다. 다만 황제의 입맛에 맞지 않는 학문들을 탄압하였으며, 정부에 반항하는 학자들을 압살하며 분서갱유와 같은 학문적 탄압도 벌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강성했지만, 통일 이후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사망한 뒤 4년만에  진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자영이 초패왕 항우에게 항복하며 멸망하였으며, 진나라의 뒤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이었다. 진나라는 중국을 15년이라는 극히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였으나, 통일 왕조의 기반을 놓고 황제 체제를 확립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맥적산 석굴

 

 

 


중국 간쑤성(甘肅省) 톈수이(天水)의 동남쪽에 맥적산(麦积山)이 있다. 그 모양새가 마치 수확한 보릿단을 쌓아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보리 '맥'자와 쌓을 '적'을 썼다. 중국어로는 마이지산이라고 불리운다. 

 

맥적산 석굴은 북위 시대부터 청나라까지 만들어진 곳으로 중국에서 진흙 불상이 가장 많은 곳이다. 

 

  

 

 

  

 

 

 

 

  

 

  

 

  

 

  


맥적산 굴은 가장 높은 곳은 84미터나 되는 곳에 다양한 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11년간 42만 명이 동원되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5미터의 호위무사가 있다.

 

맥적산 선굴은 중국 4대 석굴 중의 하나이다.  4대 석굴은 천수 맥적산 석굴, 난주 병령사 석굴, 돈황 막고굴, 투루판 천불동이다.   

  

  

 

  맥적굴

   

  난주 병령사 석굴

 

둔황 막고굴

 

 막고굴

 

투르판  천불동

 

천불동

  

 가장 높은 곳은 84미터나 되는 곳에 다양한 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11년간 42만 명이 동원되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5미터의 호위무사가 있다.

 

  

 

  

 

  

 

  

 

  


이처럼 중국의 실크로드는 부디즘 로드였다. 부디즘 로드에서 가스펠로드로 될 때까지 몇백년이 흘러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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