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역사관
한국 사람들이라면 독립기념관을 비롯, 누구나 항일과 반일의 역사관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역사관이 항일에 멈춰버린 것이다.
친공을 하든, 연공을 하든 상관이 없다. 항일만 하면 영웅이 되는 역사관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북한의 역사관과 다를 바 없다. 북한의 역사관은 무조건 항일, 반일의 역사이다.
항일의 역사관을 가진 문재인 대통령은 김원봉을 서훈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문재인대통령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밀양 '의열단 기념관'을 가면 김원봉과 그의 아내 박차정을 독립운동가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북한도 김원봉을 찬양하고 있다. 김원봉은 6.25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1958년 3월 19일 로동신문에 의하면 김원봉은 한국정부에서는 서훈을 받지 못하지만 북한에서는 "조선인민주의 인민 공화국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와 공화국의 민주 기지를 강화하는 사업에서 공적을 세운 조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원봉동지에게 그의 탄생 60주년에 제하여 로력훈장을 수여한다"고 하여 서훈을 했다.
1950년 4월 27일 로동신문에 의하면 김원봉은 "애국력량을 총집중하여 망국단선을 파탄시키자"고 하기도 하여 남한정부만의 단독선거를 인정하지 못한다고 하여 철저하게 친북한적인 입장을 개진했다.
로동신문 1950년 5월 24일 자에 의하면 김원봉은 북한방송에서 "흉악한 파시스트 이승만 도당을 철저히 소탕하자"고 하기도 했다.
로동신문 1952년 7월 6일 자에 의하면 김원봉은 "조국 해방 전쟁에서 조선인민의 역량은 유감없이 검열되었다"고 하여 그는 625도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박차정과 결혼을 하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남편은 북한, 아내는 남한정부에서 서훈받아
부산(釜山) 사람이다.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동래(東萊) 일신(日新)여학교에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朴日馨)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3월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 7월 서울 수운회관(水雲會館)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에는 조사연구부장·상무위원·선전 및 출판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근우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 시내 각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반일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후 1930년 1월 부산방직(釜山紡織) 파업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붙잡힌 박차정은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0년 2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1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결혼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의열단이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장개석(蔣介石)의 도움을 받아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선정되어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婦女部) 주임, 1936년 7월에는 이청천(李靑天)의 처 이성실(李聖實)과 함께 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하여 일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단합시켰다. 그 후 1937년 11월 의열단의 한중민족연합전선(韓中民族聯合戰線)의 일환으로 파견된 박차정은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통해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38년 4∼5월경에는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경고, 일본의 혁명대중」, 「조선부녀와 부녀운동」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총체적인 무장궐기를 촉구하였다. 그 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婦女服務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당하였다. 그 후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서거하였다. 광복 후 박차정의 유해는 경남 밀양 감천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훈전자 사료관 참조)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의 서훈
남한에서는 친공주의자인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까지 서훈을 받는다. 주세죽도 공산주의자이다.
주세죽을 서훈했으면 김원봉, 박헌영, 김일성도 서훈해야 새창보기 ㅣ 편집인
서훈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주세죽은 1919년 3.1운동당시 함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1개월간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바 있었다. 이후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 등을 주도하며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 일제는 이런 그를 ‘여자 사회주의자 중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인물’로 감시하고 있었다. 1924년 5월 서울에서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京城女子靑年同盟) 결성을 주도했다. 4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다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남편 박헌영이 일경에 붙잡힌 후, 그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6년 6월 주세죽은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일경에 다시 붙잡혔으나 2개월만에 풀려났다. 1927년 5월 근우회(槿友會)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던 주세죽은 병보석으로 출감한 박헌영과 1928년 8월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했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중국 상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던 중, 박헌영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소련에서도 주세죽은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등 박해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결론, 항일에 멈춰버린 역사
이처럼 한국의 서훈은 항일관에 멈춰버렸다. 친공을 하여도 항일만 하였다라도 서훈을 하는 것이 한국정부의 입장이다. 남편은 북한에서 아내는 남한에서 서훈을 받는다.
남편과 같은 할동을 해도 항일이라는 멈춰버린 역사에 편승하여 남편이 친공이라도 아내는 서훈하는 것이다.
반일친공이라도 서훈을 받는 것은 대한민국의 역사관이 항일에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한의 항일역사관과 다르지 않다. 김구도 반일연공이지만 남한에서는 여전이 추방받는 정치 영웅이다. 그러나 김구는 철두철미 북한에 이용당했고 반공에서 연공으오 전환하였다. 그의 자주독립관으로인한 미군철수주장은 결극 비극적인 625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역사관이 항일에 멈춰버리다 보니 친공, 연공, 종북주의자들이 여전히 영웅대접받는 사회로 전락한 것이다. 북한 매체 민주조선에 4번에 글을 기고한 임종석이 대통령비서실장이 되고, 북한을 방문한 임수경이 국회의원이 된다.
임종석의 옥중서신, 북한 로동신문에 4차례 기고 새창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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