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6일 김구, 북한 조선신문과 인터뷰

통일은 자주독립이어야 하고, 미군정의 내정간섭은 광범위

편집인 | 입력 : 2024/04/02 [05:53] | 조회수: 187

북한 매체 조선신문 1948년 5월 6일자는 평양을 떠나면서 '김구씨 기자단과 일문일답'이라는 제목으로 남북연석회의에 김구와 인터뷰를 하였다. 

 

 

  

 

 

다음은 1948년 5월 6일 북한 기자(조선신문)와 김구와의 인터뷰이다. 

  

북한 기자(문)

북조선에서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가지 생활형편을 보신뒤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가?

 

김구(답):

간고 결핍한 가운데서 자력으로써 분투노력하는 신흥기분이 있었다는 인상이 있었다. 

 

문:

남조선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가?

 

답:

일부분 진행된 점이 없지 아니하나 전체적으로 미해결이다. 

 

문:

남북조선간에 어떠한 차이점을 보이는가?

 

답:

북에서는 모든 것이 틀이 잡히는 것 같이 보였고, 남에서는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문:

남북조선이 통일과 통일적 국가수법은 현하 전조선 여론의 중심문제로 되고 있는데 선생의 견해로는 장래 통일적 조선국가가 그 성격으로나 국가적 구조로나 어떻게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되는가?

 

답:

민족을 본위로 하는 자주 독립이며 또 인민의 리익을 취한 진정한 민주주의의 국가가 되어야 하겠다. 

 

문:

남조선에서 미군정이 조선내정에 어떠한 범위로 간섭하고 있으며 그들이 조선인민에게 취하는 정책과 태도는 어떠한가?

 

답:

간섭은 광범위이며 그들의 정책과 태도는 조선인민에게 불만을 준다.

 

문:

남조선 미군정에 의하여 보장되고 있다는 소위 '자유로운 분위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김구는 유어만과의 대화에서 북한에 간 이유는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고 했다. 여기서도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발전하였다고 말했다.  

 

金: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김구는 언젠가 소련이 북한을 앞세우고 전쟁을 일으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양측의 강대국 철수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세를 모르는 낭만적인 생각에 불과했다. 

 

1947년 3월 1일 로동신문에 의하면 북한은 북조선인민회의를 해서 이미 무력통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들은 1949년 6월 미군철수만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조선 2018년 4월 19일 자에 '김구의 탄복'이라는 제목으로 "김구는 위대한 수령님과의 첫 접견에서 부터 한없이 겸허하고 인자하신 인품, 고매한 덕망에 매혹되었다"고 했다.

 

이어 "김구는 자기도 한생을 반일을 위해, 민족을 위해 살아온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위대한 수령님과의 겸호하고 소탈하신 풍모, 열화같은 인간애와 조국에, 고결한 덕망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자 북한은 김구 띄우기를 하여 김구에 대한 <위대한 품>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었다. 

 

1986년 12월 19일 조선신문은 "김구가 70고령의 인생말년에 반공의 울안에서 벗어나 반미련공, 구국통일의 대지에 한목숨 걸고 달려나온 인생전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미제와 그 주구들의 책동이 노골화 되는 이남의 현실을 진실하게 보여주면서 <단독선거>도 공산주의도 반대하던 김구가 고민끝에 구국통일을 위한 북행길에 오른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고 했다.   

 

  

 

 김구는 김일성과 1948년 4월 30일 미소양군철수라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미군철수

 

 이틀 뒤 모스크바 방송은 모든 소련군 부대가 북한을 떠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군철수를 반대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주한미군은 9월 15일부터 감축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28일, 미 국방성은 주한 미군의 전 보병 사단을 한국으로부터 철수시킨다고 발표하였다.

 

1948년 11월 여수 순천 사건으로 잠시 철수가 중단되었다가 1949년 4월 다시 철수를 시작해 5월 28일 500여명의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45,000명의 철수를 완료했다. 1949년 6월 30일부로 철수를 완료했다.

 

 

 

 

 

 

이승만, 미군철군 반대

 

김구의 생각과 달리 이승만은 미군의 장기주둔에 관한 견해를 여러번 밝혔는데 다음은 그 이유를 명확히 규정한 인터뷰 내용이다.

 

”나의 주장은 소련은 무조건하고 즉시 철퇴해야 하고, 미군은 치안유지상 지장이 없을 깨까지 주둔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철퇴하면 미군도 철퇴하겠다 하여도 애걸복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분단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오 미소 양국이 행한 것이며, 그 책임은 미국에 있다. 따라서 책임을 진 미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철퇴해야 될 것이며, 또한 북한에는 20만의 공산군이 조직되어 있는데 반하여 남한에는 미국이 앞서 우리의 군대조직을 허가하지 않은 관계상 아무 준비가 없다. 그러므로 치안을 유지할 상당한 국방군이 조직되면 그때 철퇴하라는 것이니, 이것도 미국의 책임이다.“ ([조선일보] 1948, 10. 9일자)

 

소련은 "1950년 11월 14일 스탈린 지령 하에 소련 전투항공 64사단이 한반도로 처음 파견됐다"고 보도했고 "소련 항공전투사단은 15번에 걸쳐 한국전쟁(6.25)에 참전했고 총 1만 3천 명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소련제 탱크를 끌고 진격했다. 

 

 

 

 

북한, 김구를 이용

 

김구의 미소양군철군의 생각에 북한은 이를 철두철미 이용하였던 것이다. 김구의 낭만적인 통일론은 민족주의적인 사관에 입각,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낭만적인 사관이었다. 일본군을 물치친 것은 미군, 소련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점령군으로서 분할통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구는 일제의 항복선언을 듣고, 기뻐하기 보다는 통탄을 했다. 자신이 중국에서 훈련한 광복군을 통한 항복을 받아내야 훗날 해방 후 남한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데 미군을 통한 항복을 받아냈기 때문에 김구는 해방때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서 귀국을 할수 밖에 없었다. 이미 남한은 미군정이 장악하고 있었다.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 미군철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9년 6월의 미군철수는 한반도에 또다른 비극을 안겨다 주었다. 철수하자마자, 1950년 6월 25일 소련과 북한군이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김구는 철두철미 북한에 이용당했다. 

 

그래서 김구의 자주독립은 결국 미군철군을 통한 독립이었다. 김구는 자주독립은 결국 적화통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낭만적인 독립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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