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전쟁, 김구와 김일성, 그리고 유어만

미국철수를 주장하는 김구와 반대하는 이승만

편집인 | 입력 : 2024/03/28 [06:42] | 조회수: 306

 

건국전쟁에서 김구와 유어만의 비망록이 상영되어 김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하게 되었다. 

 

김구는 대한민국에서 광복절을 기념하여 1946년 8월 15일 연설을 하게 되어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 이후 그는 1948년 4월 19일 북한으로 넘어가 남북 대 화합 연설을 한다.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1948년 2월 16일 남북한 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완전 자주 독립국가를 외친 김구가 반탁운동에 실패하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김규식과 함께 북한의 김일성과 김규식에게 "남북정치지도자간의 정치협상회의를 통하여 통일정부수립과 민주국가건설에 관한 방안을 통의하자"는 내용이 서신을 보내자, 이에 대한 호응으로 3월 15일  북측은 소련군정의 제안에 따라 김일성과 김두봉의 이름으로 김구와 김규식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독립을 위한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회의를 평양에서 열 것"을 역으로 제안했다.   

 

 

 

 

북한 김일성은 북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인 우리들은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한다고 했다.  

 

 

 

 

 

이에 백범은 응하여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평양방문기간 동안 북측의 잘 준비딘 각본에 이용당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남북협상개회는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 극장에서 열렸다.  북한 사람들은 남북협상회의에 대해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김일성이 초청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 남한에서 참석한 사람들은 695명이었다.

  © 편집인

 

 

 

 

김구는 1948년 4월 19일 민족의 분단을 막기위해 방북을 결행한다.  

 

 

 

 그의 신념은 남북통일이었다. 

 

 

 

김구는 자신의 아들 김신과 비서실장을 데리고 북한을 방문했다. 

 

 

 

김구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위를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일에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했다.  그의 신념은 하나의 대한민국이었다. 

 

 

 

 김구, 김일성, 박헌영의 1948년 4월 19일 남북 연석회의 연설은 다음과 같다.  

 

 

 

 

  

1948년 북한 로동신문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하고, 외국군대를 즉시 철거하고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1949년 9월 미군이 절수하자 북한은 바로 1950년 미군이 없음을 눈치채고 6.25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조선 로동신문에 회합 결과가 발표되자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네 명이 다시 회의를 하여 미소양군철수, 전국총선에 의한 단일국가 수립, 남한의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결의를 하였다. 김구의 입장은 외국군대를 모두 철수시키고 우리민족끼리 통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생각 별차이가 없었다.

 

 

 

이처럼 독립운동가 김구. 김규식은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4월 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김구·김규식의 역사적 평가에 있어 외국군대 철수라는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이 철저하게 김일성에게 이용당했음이 드러났다. 

 

1948년 4월 30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5월 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음을 분명히 한 뒤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은 북한과 접경하고 있어 군대를 철수시키더라도 언제든 개입할 수 있지만 미군은 한 번 철수하면 한국이 남침을 당하더라도 제때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6·25 당일 파병을 결심한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양김씨는 공산주의자들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동조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또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1년 뒤 북한군의 남침이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남침의 초대장이었다. 김구·김규식은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確言(확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속인 셈이다. 지도자가 속는 것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들이 북한에서 1948년 5월 5일 돌아왔을 때 많은 환영인파들이 38선까지 나섰다. 경찰도 그를 호위했다.

 

 

 

 

 

 



 


김구가 북한을 방문하기 6개월 전 1947년 11월 국제연합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은 유엔한국 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했다. 

 

 


유엔은 남한만의 총선을 개최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강행한 것이었다. 김구의 생각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김구는 하나의 조국을 요구하였지만 북한이 먼저 반대했다. 북한과 소련은 이미 남침의 야욕을 갖고 북한식 통일전부를 만드는 것이었다.    

 

 


유엔의 지지하에 1948년 5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되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을 하게 되었다.

 

 

 

북한도 1948년 8월 25일 최고 인민회의 선거를 하였다. 북한은 소련과 함께 북한만의 총선을 요구하였다. 북한은 이미 단독 정부의 선거를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인민주의인민공화국은 1948년 9월 9일 수립되었다.

 

 

 

미군철군

  

미군철군은 북한이 원하는 바였다. 김구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주한미군은 9월 15일부터 감축되기 시작했다. 11월 여수 순천 사건으로 잠시 철수가 중단되었다가 1949년 4월 다시 철수를 시작해 5월 28일 500여명의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45,000명의 철수를 완료했다. 1949년 6월 30일부로 철수를 완료했다.

 

 

 

 

 

1948년 12월 28일, 미 국방성은 주한 미군의 전 보병 사단을 한국으로부터 철수시킨다고 발표하였다. 이틀 뒤 모스크바 방송은 모든 소련군 부대가 북한을 떠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군철수를 반대하였다.

 

이승만, 미군철군 반대

 

김구의 생각과 달리 이승만은 미군의 장기주둔에 관한 견해를 여러번 밝혔는데 다음은 그 이유를 명확히 규정한 인터뷰 내용이다.

 

”나의 주장은 소련은 무조건하고 즉시 철퇴해야 하고, 미군은 치안유지상 지장이 없을 깨까지 주둔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철퇴하면 미군도 철퇴하겠다 하여도 애걸복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분단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오 미소 양국이 행한 것이며, 그 책임은 미국에 있다. 따라서 책임을 진 미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철퇴해야 될 것이며, 또한 북한에는 20만의 공산군이 조직되어 있는데 반하여 남한에는 미국이 앞서 우리의 군대조직을 허가하지 않은 관계상 아무 준비가 없다. 그러므로 치안을 유지할 상당한 국방군이 조직되면 그때 철퇴하라는 것이니, 이것도 미국의 책임이다.“ ([조선일보] 1948, 10. 9일자)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영도 하에 있는 자유세계의 防共제일선에 나와 있는 방위자이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요구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한국이 이렇게 된 원인이 미국의 책임이라고 믿었다.

 

미군 철수에 대한 이승만의 우려와는 달리, 그 당시의 한국민들은 국토의 분단 상황은 미국과 소련의 남북한 분할점령으로 인하여 야기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 외국군의 철수를 한국의 분단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존재하였다.

 

김구의 생각이 어느정도 일리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통일과 독립의 전제조건으로써 전 외국군의 철수를 강력히 바라고 있었으며, 이러한 철수의 요구는 강력하였다.

 

불안한 정세를 감지한 이승만은 국내의 공산분자들을 처벌하고 즉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현대적이고 효과적인 무기를 공급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당시 남한 군대는 구식 보병과 포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북한이 사주한 소수의 유격전술을 채택하여 장기적이고 소모적인 전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49년 2월 17일, 이 대통령은 같은 주제에 대해서 강한 어조로 올리버에게 편지를 재차 썼다.

 

“우리들은 스스로의 방위를 가능하게 할 만큼의 무기를 신청하였소. ‘적절한’ 경로를 통해서 우리가 수없이 요청하였으나 얻은 것은 아주 적은 수량이오. 38선 너머 저쪽 병사는 여전히 사정거리가 긴 소총으로 우리를 쏠 수 있소. 이런 소총을 못 가진 우리 경찰들은 적의 손아귀에 달려 있소.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우리 군대는 38선 연변에 주둔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소.”

 

이승만은 탱크, 화염방사기, 그리고 다른 현대 무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탱크는 이 땅에 맞지 않소” 등의 논리로 거절당했다. 미국이 한국을 방기하자, 1년만에 6.25전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김구의 생각보다 이승만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김구와 유어만과의 대화(1948. 7. 11)

 

이번에 영화건국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유어만과 대화에서 비롯된 김구의 주장이었다. 

 

 

 


우선 유어만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유어만의 중국이름은 류위완이다.

 

유어만은 1916년 우창현(武昌縣)[2]에서 문화학교(文華學校)를 졸업하고 칭화대학에 입학했다. 칭화대학 재학 중에 학생회 평의위원회 주석을 역임했고, 1920년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해 오벌린 칼리지(Oberlin College)에서 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한 엘리트이다.

 

그는 1945년 6월 주 일본 연합군 본부 중국 대표로 파견되었고, 11월에는 주 경성부 공사 직함 대우 중화민국 총영사가 되어 파견되었다. 1948년 8월에는 주 대한민국 대사 외교대표로 특파되어 유엔 주 대한민국 위원회 중국 수석 대표 및 주 대한민국 위원회 주임위원을 겸임했다.

 

1950년 6월에는 주일대표단 (대사 직함) 부단장이 되어 일본을 다녀왔고, 1951년 1월에는 주 유엔 대표 판사처 고문에 임명되어 유엔총회 상임위원회 중국대표단 비서장을 역임했다.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특히 김구)과 몹시 친하게 지냈으며 미군정, 중화민국에 임시정부를 긍정적으로 말해주었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이 훗날 중화민국 대사가 되자 자주 방문하였다고 한다. 백범 김구의 가족과는 돈독한 관계가 있었다. 

 

그는 김구와 대화를 나눈 뒤 유어만 회담록을 만들어서 이승만에게 건네주었다 한다.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대표인 劉馭萬(유어만) 공사는 1948년 7월11일 오전 11시 金九를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김구가 북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이후의 일이다.  

 

유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영문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이 문서는 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이 대화는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는 일에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은 金九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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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구의 입장이다. 김구는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훨신 강하기 때문에 소련은 밀고 들어오면 단시간내에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을 알고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미군이 철군을 하자마자 625가 바로 발생하였다.  

 

Kim: One of the motives for going to the Leaders Conference was to see the actual things happening in North Korea. Even if the Communists stop expanding the Korean Red Army for three years to come, all the efforts in South Korea will hardly be able to build up an army to the present strength of the red army. The Russians will easily set it on its southward swoop without incurring the blame for the moment a government is set up here, the People's Republic will be proclaimed.

 

 

金: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Liu: It will not happen unless Russia means war which she doesn't. In the past Russia reconciled twice before international coercion, once from Korea and the other time from the Laotung [Liaodong] Peninsula. Probably she will do so again under the impact of the roused world opinion working through UN. If the government now being set up is to be an American puppet just as the northern regime is a Russian one, I could easily understand your stand to collaborate with neither. With UN backing, it will be a sovereign one, a base to win union from. The weaker you find it, the more unreserved should be the weight you throw in.


劉: 러시아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하여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 앞에서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고 하는 정부가, 북한정권이 러시아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主權(주권)국가가 될 것이고, 통일을 성취할 基地(기지)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이 약하게 보일수록 선생께선 조건 없이 (建國을 위하여) 투신하셔야 합니다(끝).

 

이상 두 사람의 대화를 보았을 때 김구의 의도는 북한이 남한의 군사력보다 강하기 때문에 소련은 북한을 이용하여 남진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북한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북한에 간 것이었다. 북한은 남한보다 군대가 훨신 강한 것을 알게 되었고, 소련이 북한을 앞세우고 밀고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2년 후에 김구의 예언대로 소련군이 북한군을 앞세워 625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김구는 차음부터 자주독립을 위하여 미소 양군이 철군을 하고, 남북한이 합쳐서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일성과 합의한 남북한 공동성명서에 외국군이 철수해도 내전이 없음을 약속하자고 한 것은 이율배반적인 것이 되고 만다.

 

김구는 낭만적인 통일에 편승했다. 이러한 김구의 생각은 민중들에 반영되어 미군철군을 요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예언이 적중했다. 그는 처음부터 미군철수를 반대한 인물이었다. 김구의 생각대로 미군철군은 민주통일이 아니라 적화통일로 야기되어 민족에게 엄청난 동족 상잔의 비극을 갖게 하였다. 시대를 파악하지 못환 김구의 낭만적잍 통일론이 가져온 결과였다. 

 

 

 

 

결국 김구와 이승만의 차이는 미군철수에 있다. 김구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를 위하여 미군철수를 원했고, 이승만은 미군철수를 반대했다.  결국 이승만의 에언이 적중한 것이다. 이승만은 미군이 떠나면 한국이 적화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김구가 북한에 갔을 때 북한은 이미 단독정부수립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적화야욕을 이미 민족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낭만적인 독립을 위한 외국군대 철수요구는 대한민국의 또다른 시련을 가져도 주었다.  통일낭만은 또다른 비극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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