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멕시코편1)

대이민사기극과 기독교인 인삼장사 박영순의 편지

편집인 | 입력 : 2023/09/13 [05:34] | 조회수: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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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한인들

 

2021년 현재 중남미 전 지역에 9만 289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2021년 중남미 한인분포 현황

 

국가별로 살펴보면 브라질이 3만 6천 540명으로 동포의 수가 가장 많다. 두 번째가 아르헨티나로 2만 2천 847명, 세 번째는 멕시코로 1만 1천 107명 살고 있다. 과테말라 5,629명, 파라과이 4,883명, 칠레 2,402 명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해외 동포청(2021년 중남미 해외 동포 현황)


멕시코로 출항 

 

멕시코로의 출항은 1905년 4월 4일 영국의 화물선 일포드호를 타고 제물포를 출발하여 5월 9일 살리나크루스 항에 도착하여 열차로 갈아타서 프레그레소 항에 5월 15일 도착한다.

 

  일포드 호

 

한 달이 넘는 긴 항해 동안 아이 2명과 어른 1명이 숨지고, 1명이 태어났다. 모두 1천31명이 멕시코 땅을 밟았다. 같은 날 5월 15일 열차로 메리다에 도착해서 20개 농장에 배치를 받는다. 

  

 

  

 

 가토모토시로의 보고서

  

 

이민 브로커에 속은 멕시코 농부모집


이러한 멕시코 이민은 처음부터 사기 이민이었다. 1904년 황성신문에는 농부모집 광고가 실려있었다. 

 

1904년 12월 17일부터 무려 한 달여 동안 황성신문에는 “농부모집광고”라는 제목으로 2면에 3단으로 광고가 계속 되었다.

그 광고 속에는 멕시코는 미국과 함께 문명부강국이고 물과 토양이 좋고 기후가 따뜻하여 질병이 없어, 일본과 중국인들이 이미 멕시코에 건너가서 이득을 보고 있다는 찬사가 가득하다.

 

한국과 멕시코가 협의하여 최빈국대우를 받게 되어 이번에 대륙식민합자회사라는 곳에서 농부를 모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기 광고

 

존 마이어스는 1903년 1월 13일 미국 하와이 호눌룰루항에 도착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한국인 최초의 계약 이민자들을 주목했다. 

1905년 4월초, 멕시코 유카탄 에니깽농장 브로커인 존 마이어스(John G. Meyers)가 조선 전역에 걸쳐 “‘묵서가는 문명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여 나쁜 병질이 없는 나라이며 노동을 하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내용의 ‘농부모집광고’를 하였다.

 

마이어스는 일본의 인력송출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를 통해 국내 언론에 광고를 냈다. '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의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가난에 찌들리고 어수선한 정국에 살던 한국인들은 솔깃했다. 게다가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극락 같은 곳이다", "누구든 병들면 고쳐준다"는 등의 소문도 호기심을 부추겼다.

 

남자 802명, 여자 207명 등 총 1천33명이 묵서가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들은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1905년 4월 4일 인천 제물포항에 모여 영국 상선 일포드호에 올랐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한 이 광고 속에는 받게 될 월급이나 토지 같은 장밋빛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가장 유력한 신문에 실렸던 광고이니 누구라고 믿지 않을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계약서에 의하면 열심히 일하면 하루에 3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지상 낙원 멕시코에 가면 일당 1원30전에서 3원까지 보장한다고 황성신문에 모집 광고를 냈지만 실제로는 하루 35전밖에 주지 않았다. 그나마 하루 식대 20전을 떼고 지급했다.

 

  

 

희망은 절망으로 


한인들이 1905년 5월 15일 유카탄 반도에 도착해서 4년간의 노동 계약을 맺고 금의환향을 꿈꾸며 약 1,033명이 사기로 인해 태평양을 건너와 멕시코  에네껜(henequén) 농장으로 분산되어 거의 노예와 같은 혹독한 생활을 하면서 한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게다가 일제의 한반도 침략으로 인하여 모국과 완전히 단절된 고립무원의 유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노동 계약 이후에 돌아갈 조국조차 사라지자, 귀국을 포기한 한인들은 생존의 활로를 찾아 멕시코 전 지역으로 분산되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멕시코인들과의 혼혈이 증가하고 한국어를 잊어감에 따라 민족 정체성도 점차 상실되어 갔다.

조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멕시코의 한인들은 조국과의 관계 복원에 실패하였고, 지방회의 주축이 한인 2세로 바뀌는 1950년대부터 그들의 존재는 대한민국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지옥의 삶


지상낙원으로 알고 있던 멕시코의 환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옥 이상이었다. 한인들은 새벽 4시부터 어두울 때까지 쏟아지는 땡볕에서 애니깽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겨냈다. 섭씨 40도가 되는 햇볕 아래서 하루 12시간이라는 ‘애니깽’ 농장의 중노동이 시작됐다.

애니깽은 독성이 강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많은 용설란의 한 종이다. 한인들은 애니깽 농장에서 애니깽처럼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애니깽은 노예로 팔려온 한인들의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애니깽은 주로 배에서 쓰는 밧줄의 원료로 쓰였으며, 카펫이나 옷감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멕시코 유카탄이 원산지였다.

 

한인들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얼굴이 검게 타고, 가시에 찔려 손에서 피가 나기 일쑤였고 흑인보다 못한 노예로 취급하였다. 이들은 두루마리와 갓, 한복을 입고 도착했다. 

 

 


그러나 멕시칸인들은 한인들의 기를 꺽기 위하여 도착하자 마자, 목숨보다 더 귀중한 상투부터 잘랐다.

 

  


게다가 정해진 하루 일감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채찍질도 가했으며 도망자가 발생하면 총으로 위협하면서 모두에게 책임을 묻기도 했다. 

 

 

 

  

 

선인장과에 속하는 애니깽을 자르느라 심지어는 가시에 찔려 눈이 먼 사람도 나타났다. 

 

(1977년) 73살 현오목 할머니의 얘기다.

 

"어저귀(애니깽)가 이렇 잎사귀가 돋지 않았어요? 그 끝에는 가시가 이 만큼씩 합니다.그 가시에 찔려 눈 머신 어른도 있고 여긴 모두 가시풀이죠. 가죽 신발을 하고 갑바를 치고 그렇게 들어가야 어저귀를 겨우 따요. 풀을 쳐 준다해도. 그 어저귀밭에 나가서 우시는 어른도 많았대요. 숱하게 물에 빠져 죽으신 어른 병들어 죽으신 어른…."

 

 

  

 

  

 

황성신문 1905년 7월 29일자 사설은 당시 한인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그대로 반영했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

 

"산 설고 물 설은 묵서가 유카탄 반도에서 매일 매를 맞아가며 우마(牛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노예의 생활을 하며 모든 것을 저주하고 모든 것을 비관하는 동포들은 병에 걸려 무참히 죽은 이가 실로 적지 아니 하다 하며, 그리하고 농장주인과 대항하여 '나는 노예가 아닌데 왜 이다지 나를 학대하느냐'하고 말썽을 부리다가 필경은 농장 주인에게 매를 맞아 원통한 혼백(魂魄)이 된 동포도 2~3명에 달한다 한다...(중략)...4년의 긴 세월이 꿈속 같이 지나가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1천여명의 남녀 동포는 자유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 하리요! 그네들의 손에는 돈 한 푼이 없으며 그네들의 앞에는 별다른 방책이 없었다. 이리하여 다시 그곳에서 매일 몇 시간씩 일을 하여 얼마 아니 되는 수입으로 그날그날의 가련한 생명을 유지하였다 한다." (1922년 8월 6일자 동아일보)

 

이 신문은 7등급 노예로 전락한 한인들의 참상을 보도하고, 이틀 후 고종의 이민정책을 비판하는 사설도 게재했다. 당시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송환 계획을 세웠지만 일본의 방해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기사로 더는 멕시코에 노동자를 보내지 않았고, 110년 전 사기극은 그렇게 단 한 차례로 막을 내렸다.

 

한인들이 ‘배치’된 24개 지역 즉 사탕수수 · 애니깽 ·어저귀 · 선인장 농장과 광산 · 시멘트 공장은 이들을 돌연 노예로 바꾸어버렸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며, 숙식도 엉망이었고,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넓은 밀림지대는 캄캄한 지옥이었다. 채찍 아래서 이들 ‘애니깽’들은 새벽 5시부터 밤 늦게까지 일했다. 브로커들의 대국민사기극이었다. 이단감별사들이 교리로 대교회 사기극을 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95살 김은순 할머니의 얘기다.

 

"진 종일 나가서 '도스 밀' 말이 그렇지 그게 적습니까? 도스 밀이면 그게 얼마예요. 몇 점(몇 시)에 나가는 줄 알아요? 새벽 3점에 나갑니다. 새벽 3점에 나가서 저녁 4점에 들어옵니다."

 

'도스 밀'이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2천이라는 숫자로서 에네켄 잎을 따서 가시 없애기를 하루 2천 개씩 했다는 얘기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해도 2천 개를 하기는 어려웠다. 2천 개를 하지 못하면 채찍으로 때렸다. 하와이에서는 농장마다 달라서 채찍질을 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러나 멕시코 이민 1세들은 어느 농장이건 채찍질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농장의 개만도 못합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힘없는 민족의 설움이었다. 본국에서는 일본에게 설움을 당했고, 해외는 러시아, 중국, 멕시코, 쿠바에게 설움을 당했다.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찬탈, 고종의 무능함으로 인해 해외로 희망을 찾아 나선 한인들은 희망대신 절망을 얻었고, 기쁨 대신 한숨을, 희락대신 고통을 얻었다. 나라잃은 민족의 설움이었다.   

 

인삼 상인 독립군 박영순의 한 통의 편지

  

인삼상인들은 인삼 팔아 조국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에 힘을 보태기 위해 중남미지역까지 갔다. 데이빗 방이라는 사람도 “아버지(방사겸)는 미국 뿐 아니라 쿠바·자메이카 등 중남미 지역에도 인삼을 팔러 다녔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들은 인삼 독립군이었다.

 

 

  

 

 

  

 

 

 

 

  

 

 

교회를 설립한 인삼상인들


그들은 샌브란시스코에 1904년 상항감리교회의 설립에도 후원을 하였다. 
 안창호와 인삼상인들이 창립멤버였다.

 

 

 

친일파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장인환도 상항감리교회 교인이자 대동보국회 소속으로 인삼장사였다.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은 살인 25년형을 얻도받지만 1919년에 출소한다. 

 

  

 

그는 상항 감리교회 창립멤버였다. 

 

  

 

1919년 교회 출석부에는 장인환 선생이 교회에 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인삼장사들은 기독교인이자 대동보국회 소속이었다. 

 

  

 

미들리 묘지에는 인삼 상인 박영순의 이름이 적혀있다(우측). 방사겸. 박영순은 대동보국회 소속이었다. 

 

  방사겸과 독립금 기부 내역이 적힌 그의 일기장. 오른쪽은 리들리의 한인 무연고 묘지와 박영순이 포함된 기부자 기념비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박영순도 대동보국회 소속

 

인삼을 팔러 멕시코까지 흘러들어갔던 박영순도 대동보국회회 소속이자 상항감리교회 소속 교인이었다.

 

  

 

 

한 명의 기독교인이 멕시코 한인들의 삶을 보고 하와이 북미한인공립협회에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짓말로 사람을 모아다 노예를 만들었는데, 근래에 또 이민을 모집한다는 말이 있으니 우리의 소식을 본국에 보내서 동포들이 다시 이곳에 오지 않도록 알려달라고 합니다.…이곳에 이민된 동포들은 낮이면 불같이 뜨거운 가시밭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일하고, 밤이면 토굴에 들어가 밤을 지새며 매일 품값으로 35전을 받으니 의복은 생각할 여지도 없고 겨우 죽이나 끓여서 연명할 뿐으로 그 처지가 농장 주인의 개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당시 인삼장사들은 무명의 상인독립군이었다. 인삼은 독립의 뿌리가 되었다. 

 

  

  

  

 

그들은 인삼판매로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였다. 

 

  

 

조선총독부도 한인들이 인삼을 판매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도항하는 자가 있다고 할 정도였다. 

 

  

 

상하이에서도 인산상인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백범도 인삼취급을 요청하였다. 

 

  


부산경찰서 서장실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박재혁도 폭탄 의거 직전까지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던 인삼 상인이었다. 인삼상인들은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1884년부터 한인들 미국에 이주

 

흔히 미주 이민의 시초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1903년)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먼저 인삼 상인들이 10년 전에 미국 본토에 상륙했다.

 

미국 이민국 통계로는 1894년부터 1899년까지 약 150명의 한인들이 샌프란시스코 항을 통해 입국했는데, 그 가운데 90명 정도가 인삼 상인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은 주로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인삼 판매에 나섰다.

 

1905년에 고려인삼이 영문으로 소개되었다. 

 

  

 

인삼 상인들이 입국신고서에 한인 도매상 ‘광덕회사’를 목적 장소로 썼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이곳은 1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삼을 판매하고 있다. 

 

  

 

일본 자료에 따르면 1892년 고려인삼의 가격은 미국삼의 5배, 일본삼의 4배, 중국삼의 10배에 달해 금값과 맞먹을 정도였다. 고려 인삼의 뛰어난 효능과 가치를 무기로 한인 상인들은 중국·동남아를 넘어 북미 대륙에도 진출했다. 

 

인삼 상인들은 초기 이민 사회 정착을 위해 상항 한인교회 건립비용을 댔고 대동교육회를 만들어 민족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이 단체는 안창호의 공립협회와 합쳐져 미주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로 발전되었다.


박영순도 이러한 사람 들 중의 하나였다. 즉 인삼 상인 독립군이었다.

박영순의 편지는 하와이를 거쳐 본국에 전달되었다. 정부는 한국주재 미국공사관의 통역이던 윤치호를 멕시코로 급파했다.

 

하와이에서 배멀미 때문에 멕시코 현지 조사를 포기하고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 연락해 멕시코 한인 노동자 실태를 파악하게 했다. 미주지역 한인들은 멕시코 한인들을 미국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힘을 쓰면서 성금도 모았다.

 

이 소식이 멕시코에 알려지자, 참지 못한 한인 4명이 농장을 탈출해 1906년 9월1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불법으로 입국하는 바람에 멕시코 정부와 미국 정부가 틀어져 미국 이주 계획은 실패했다.

 

4년 계약 기간이 끝나자 한인들은 멕시코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개중에는 미국이나 하와이, 본국으로 간 이들도 있었다. 가진 것은 노동력밖에 없었으므로, 품삯만 높다면 어디든 가야 할 판이었다. 먼저 쿠바로 가 있던 한인 이해영씨가 사탕수수 농장 일이 벌이가 좋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5년을 산 멕시코가 제2의 고향, 쿠바가 제3의 고향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쿠바까지 일자리를 찾아서 들어갔던 것이다. 나라잃은 한인들은 쿠바까지 가게 되었다. 그야말로 복음이 아니라 노동을 위하여 땅끝까지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강제노동소문을 듣고 파송된 황사영

  

미국 대한인국민회에서는 멕시코 강제노동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황사영씨를 멕시코에 파송하기도 했다. 

 

 

 

  

우상범 목사는 1967년 멕시코로 건너가 바로 그분들을 위해 그곳에서 6년동안 선교 활동을 하면서 멕시코 한인들로부터 황사영씨가 파송되어 세계 알려졌다고 했다.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 지방에 한국동포들이 많이 와서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그런 소문이 들려서 그때 미국에 있는 국민회에서 황사영씨로 기억되는데 그분하고 또한 분을 실제 파견한 일이 있습니다. '인삼장수가 말한 사실 그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분들이 멕시코에 와서 실제 우리 동포들이 거기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다 조사해 가지고 돌아온 다음에 국민회에 보고함으로 인해서 이제 세계에 알려졌고 우리 나라 정부에서도 알게됐어요."

 

인삼장사 독립군 박영순은 캘리포니아 리들리에 잠들고 있다. 

 

  

 

  


이수정의 한 통의 편지가 미국에서 언더우드의 마음을 움직여 한국에 선교사로 온 것처럼, 교인 박영순의 한 통의 편지가 멕시코 한인들의 노예와 같은 삶을 전세계에 알린 것이다. 이 한 통의 편지로 사기 이민이 드러나 제2의 대국민이민사기극은 사라졌다.  

 


 
캘리포니아에 가면 박영순의 묘를 찾아볼 필요성이 있다.

 

기독교인 이수정의 한 통의 편지가 한국민의 영혼을 살렸고, 기독교인 박영순의 한 통의 편지가 멕시코 노예의 삶을 막을 내리게 했고, 기독교인 바울의 13통의 편지는 전세계의 영혼을 살렸다. 나성에 가면 박영순의 묘를 참배하고 편지를 띄울 띄울 필요가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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