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 항쟁시 북한의 고정간첩이나 자생간첩이 개입되어 소요를 일으킨 것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가질 수 있다. 언어, 총, 시체시위, 무기고 탈취, 교도소 습격를 통해서 살펴보자.
1. 언어
5.18 광주에 북한 고정간첩이 들어왔을 가능성은 언어를 통하여 보면 알 수 있다. 북한 아나운서는 광주항쟁을 뉴스화하면서 광주에 걸려있었던 현수막을 읽어준다. '전두환 찢어 죽여라', '계엄령 철폐하라' 등이다.
1980년 5월 24일 민주조선에 '전두한 찢어죽이라'는 현수막이 있는 사진이 실렸다.
2. 시체시위
시체시위는 좌익들이 단골로 사용하는 선동양식이다. 1946년 대구 10월 폭동 때에도 경찰이 발포로 사람을 두 명 죽이자 좌익의 학생들은 병원에서 해부용시체를 마치 경찰이 죽인 시체인 것처럼 하여 시위를 주도하니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러한 방법이 광주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것은 북한 간첩들이 개입한 흔적이다.
3. 카빈총 사격
계엄사가 1980. 5. 21. 1시 부터 집단 발포를 하였는데 M16총으로 사망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카빈총으로 사망한 사람도 세 명이 있었다.
영상에 나오는 이성자, 나홍수, 조사천은 카빈총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사천
시민군의 총에 맞았다는 것이다. 조사천의 사인은 좌전흉부. 맹관상이다.
시민군위 옥상에서 쏜 총에 의하여 희생된 것이다.
도태우변호사는 김대령의 책을 통하여 당시 시민군이 시민군을 쏘았다는 증언을 말하고 있다.
공수부대로부터 5.19 최초로 총을 맞은 조대부고출신 김영찬 군은 M16을 사입구인 배에 맞고 엉덩이 부분이 사출구로 되어 있다. M 16 소총으로 관통된 사입구보다 사출구가 훨씬 구멍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카빈총에 맞았는지, M16에 맞았는지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4. 무기고 탈취
시민군들은 4시간만에 17개시군 38개 무기고를 털었다. 1980년 5월 21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4시간 동안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 위장돼 있는 38개 무기고가 털렸다.
38개 팀이 각 무기고로 가는 약도 한 장씩을 가지고 동시에 출발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반 국민은 무기고 옆을 지나면서도 그게 무기고인지를 알지 못한다. 무기고 위치는 비밀로 관리되는 것이다. 특히 TNT폭발물 3천 상자를 탈취하였다는 것은 광주시 자체를 날려버리겠다는 것이다.
문용동전도사는 이러한 위험을 인지하여 도청안에서 피하지 않고 폭발물을 제거한 후에 나오다가 공수부대의 총에 맞아 숨졌다.
아세아 자동차 3백 28대가 4시간만에 털렸다. 모두 자동차 키가 꽂혀 있었다고 한다. 사전에 계획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5. 교도소 공격
시민군들은 교도소를 6번이나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3공수 여단이 교도소 주변에서 지키고 있었다.
교도소에는 미전향간첩 20여 명, 남조선해방전선 관련 사범 10여 명, 보안법 위반자및 제일교포 간첩과 반체제 공안인사 150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감옥에 갇힌 간첩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했던 것만 보더라도 고정간첩들이 개입하였을 가능성은 크다.
결론적으로 518 광주 항쟁은 언어, 시위 방법, 카빈총 사망, 무기고탈취, 교도소 공격등으로 보았을 때 시민군내에 전문적인 북한간첩들이 소요의 원인제공을 하여 광주를 혼란과 무질서의 도시로 만드려고 했다는 합리적 의혹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