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 항쟁이 43돐을 맞는다. 광주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그러나 아직 5.18은 끝나지 않았다. 진실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요약하면 전광훈목사가 발언한대로 시민군이 든 카빈총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5.18은 엠16에 의하여 죽은 사람들만의 문제에 집중했다. 앞으로는 카빈총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문제도 거론할 필요가 있다.
mbc는 2013년에 광주 5.18 열흘간의 기록을 제작했다. 이 내용을 보면 광주의 사태를 잘 알 수 있다.
5월 24일은 계엄군이 가장 많이 죽은 날
광주에 온 군내에 오인사격이 발생하여 많은 군인들이 5월 24일 13명이 죽는다. 무기고를 탈취한 지 3일이 지난 시점이다. 외부 세력이 계엄군을 쏘았을 가능성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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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재단 상임이사 송선태씨는 사용한 통신기기, 예비주파수, 호출부호도 다 달랐다고 한다.
이처럼 아직도 광주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많이 있다. 북한군 내지는 북한의 고정간첩이 과연 들어왔느냐 논란이 뜨겁다.
지만원씨가 북한군 개입발언으로 충분히 입증을 하지 못하자 허위사실로 인해 2년 징역선고를 받았다.
전광훈목사의 주장
다시 전광훈목사가 북한인들의 개입 가능성을 주장하여 논란을 주고 있다. 전광훈목사는 고정간첩이 들어왔다는 주장이다.
계엄사령과 이희성, 고정간첩 들어왔을 가능성 시사
당시 이희성 계엄 사령관도 고정간첩의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친애하는 시민여러분!
이제까지는 여러분의 이성과 애국에 호소하여 질서회복과 질서확립을 기대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총기와 탄약과 폭발물을 탈취한 폭도들의 횡포는 계속 가열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군인이 소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민여러분!
소요는 고정간첩, 불순분자, 깡패에 의해 조정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대열을 이탈하여 집과 직장으로 돌아가십시오.
1980. 5. 23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전광훈목사는 북한의 고정간첩이 시민군뒤에서 총을 쏘았다고 주장하여 고발을 당하였다.
복면을 한 사람들
당시의 고정간첩들은 복면을 하고 쏘았을 가능성이 많이 있다. 그들은 복면을 하고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카빈총을 들고 다녔다.
그들은 항시 복면을 하고 차를 끌면서 광주시내를 다녔다.
아니면 중무장한 시민군들이 다니면서 쏘았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중무장한 광주 시민군
광주지검 검시
광주지검의 검시에 의하면 28명의 사람들이 카빈총에 의하여 사망했다고 검시했다.
M16과 카빈총의 구분
"알이 몸속에 들어간 사입구와 몸을 뚫고 나온 사출구의 외형적 상태만 기록하기로 합의했다. 보통 M16은 가입구보다는 사출구의 크기가 더 크며, 카빈소총은 사입구와 사출구의 크기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했다는 것. 또한 후에 전문 법의학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탄화흔적이 있는 것도 기록해 두었다고 했다. "
"황박사는 이 자료는 분명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당시 상황을 감안해 기록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피해상황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근거가 된 다는 것이다."
윤상원(윤개원, 자상, 화상)
윤상원을 비롯한 청년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는 것은 살해된 시민들의 피를 파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무기 반납에 완강하게 반발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수파와 투항파의 ‘강온갈등’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윤상원은 도청 2층 민원실에 이양현, 김영철, 윤석루, 이재호 등과 함께 남은 최후의 한 사람이다. 김영철은 들불야학 강학으로 윤상원과 마찬가지로 광천동시민아파트에 거주했다.
이양현은 윤상원과 함께 김상윤이 운영한 학습 소모임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1975년, 윤상원은 군대를 제대한 후 복학했다. 얼마 후 그는 친구 황철홍에게 김상윤이라는 이름의 선배를 소개받았다. 김상윤은 전남대학교 학생운동가로 당대 활동가들에게 ‘이론적 기둥’으로 통했던 인물이었다.
1974년, 김상윤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이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며 학생들의 반(反)유신시위 준비를 정권 인수 시도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도 본인들의 수사 결과를 믿지 않았는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던 김상윤은 1975년 2월 15일자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풀려났다.
그는 석방 직후부터 활동가 양성에 주력했다. 노준현, 김영종, 김금해를 비롯한 활동가들이 그가 만든 6개월 과정의 학습 소모임을 거쳐갔다.
윤상원 역시 김상윤으로부터 학습 소모임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들이 함께 공부한 책은 ‘역사란 무엇인가’, ‘한국 노동문제의 구조’ 등이었다.
1970년대 경제발전의 이면에서 신음하고 있던 노동자들의 삶을 인지하며, 윤상원은 사회 변화를 열망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마침내 군인들이 광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특수부대 3·7·11공수여단과 20사단, 31사단 소속 군인 2만명이 동원되었다.
도청에 진입한건 3공수여단 선봉대였다. 이들은 뒷문을 통해 도청에 진입했다. 잠시 후, 3공수여단 군인들이 도청 민원실 입구에 도착했다. 수류탄이 날아왔고, M-16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군인들의 난사 직후 윤상원이 오른쪽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김영철과 이양현이 부축했지만, 윤상원은 김영철에게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김영철은 윤상원을 바닥에 고이 안치한 후 카빈 소총으로 자결을 시도했지만, 계엄군이 쏜 총탄 파편에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김영철은 엠16을 맞은 것으로 되어 있다.
윤상원의 몸은 전신이 화상이었다. 시민 16명이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5.18 사이버참배는 새벽 3시부터 계엄군 공수부대 특공대의 집중사격이 시작 됐고, 그들과 교전하던 과정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 다수의 시민군이 사망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윤상원(윤개원)의 사인은 자상과 화상이었다.
윤상원 씨의 시신은 28일, 다른 영령들과 망월동으로 옮겨졌고 관번호 57, 검안번호4-1, 묘지번호 111로 가매장 됐다.
아시아저널 스트리트 노먼 쑈기자는 도청에 올라가 윤상원의 시신을 사진에 담았다. 그는 화상으로 붉게 그을려져있었다
사회자인 문성근도 KBS 인물현대사에서 윤상원은 붉게 그을러져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문용동(엠16 총상)
호남신대 출신 문용동전도사가 공수부대원에 의해 사망했다. 광주지검이 분석한 서류목록에 문용동전도사의 이름이 나온다.
문용동전도사는 5.18 관련 사망자 검시내용에 '엠16 총상'이라고 적혀있다.
문용동에 대한 기사도 계엄군과 맞서다가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계엄군이 쏜 엠16 총탄에 숨진 것이다.
박기현(타박상)
계엄군은 박군을 데모꾼 연락병으로 지목하며 진압봉으로 구타했고, 박군은 다음 날 다발성 타박상으로 사망한 채 전남대 병원에서 발견됐습니다.
공수부대가 송하동에서 주변민가에 화풀이 민간인 학살을 한다. 그러기때문에 이들의 몸은 모두 엠16 총상으로 사살된 것이 되어야 맞는다.
고규석과 임은택
그러나 고규석과 임은택은 계엄사의 총에 맞아 숨졌는데 카빈총상으로 되어 있다.
윤기권의 월북
당시 고정간첩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윤기권)이 보상금을 타자마자 바로 월북한다.
518 전자자료 총서 20권, 247P
대동고교 출신 고 전영진 열사의 친구 윤기관씨(29)는 5.18 부상자 동지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지난해 광주 보상금 수령직후 홀련히 월북을 한 것으로 알려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윤기권은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아 보상금 2억원을 받아챙긴 윤기권은 즉시 월북하였다. 그는 미국만행을 규탄했다.
광주봉기의 잊을수 없는 최후의 밤/의 저자
(평양 5월 25일발 조선중앙통신)남조선 광주에 살고 있다가 1991년에 의거입북하여 현재 평양시 교수강습 및 학생답사견학소에서 지도교원으로 사업하고 있는 윤기권이 광주인민봉기 20돐에 즈음하여 <광주봉기의 잊을수 없는 최후의 밤>이라는 제목의 수기를 발표하였다.
수기는 다음과 같다.
1980년 5월 26일 밤은 하나의 고장으로 생겨 난이래 광주가 맞은 가장 긴장한 하루 밤이였다.
전두환일당에 의해 5.17폭거가 터지자 광주시민들은 항의시위에 떨쳐 나섰다.그때 나도 같은 또래의 고등학교 동무들과 함께 시위대오에 뛰여 들었다.
파쑈광들은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댔었는데 이것은 애국시민들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이였다.폭도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바로 총칼을 마구 휘둘러 댄 그들이였다.
<유신체제>의 철페를 절규한 시민들의 평화적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발톱까지 무장한 계엄군을 투입하여 학살만행을 마구 자행한 자들이 폭도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겠는가.
사실 나는 자신이 속해 있던 시위대오가 <향군회관>앞 거리에서 처음 파쑈계엄군과 맞다 들었을 때 설마 총을 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였다.느닷없이 귀청을 째는듯한 총성이 울린 순간 지끈하며 한쪽 팔이 떨어 져 나가는듯한 모진 아픔을 느꼈다.흉탄에 맞았던것이다.정신이 아찔해지는 바람에 나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푹푹 쓰러지는것도 미처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오는 주춤한 것이 아니라 더욱 노호하였다.이런 사태가 광주의 이거리,저거리에서 일어 났다.말하자면 계엄군이 울린 폭압의 총성은 평화적시위자들을 놀래운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을 봉기에로 불러 일으킨 신호성으로 되였다.
광주봉기는 이렇게 해서 일어 났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되고 27일 새벽에 접어 들자 <도청>일대에는 긴박감이 한층 감돌았다.그러나 시민군들의 얼굴들은 근엄하면서도 랑만에 넘쳐 있었다.최후의 순간을 내다 보면서도 그들은 투쟁가를 부르고 가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서로 고무하였다.
그런속에서 갑자기 파쑈계엄군의 도시 재진입을 알리는 다급하면서도 침착한 녀성방송원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거듭 울려 나왔다.
시민군은 저마다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격발기를 당기며 위치를 차지하였다.좀 있더니 땅크,장갑차의 무한궤도 소리가 울리고 총소리,폭음소리가 정신이 나갈 지경으로 울리기 시작하였다.계엄군이 <도청>일대를 포위하고 총공격에로 넘어 간것이였다.
총소리가 콩볶듯한속에서 도간도간 계엄군측에서 확성기로 투항하라는 위협적인 소리가 울려 나왔다.시민군측은 이에 <유신체제를 철페하라>,<전두환을 찢어 죽이라>라는 구호의 웨침으로 대답하면서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도청>건물에서도 항전의 총탄이 뿜어 졌고 내가 있던 기독교청년회관에서도 복수의 불줄기가 계엄군을 향해 뻗어 나갔다.
<도청>일대에서의 총격전은 새벽 4시부터 시작되여 아침 7시가 넘도록 계속되였다.참으로 가렬한 항전이였다.
...
그 최후의 결전으로부터 20년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그러나 광주애국렬사들은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그것은 그간 남조선에서 <문민>의 간판을 달았던 <정권>도 나왔고 <국민>의 명판을 단 <정권>도 나왔으나 달라진것이란 아무것도 없기때문이다.
이에서 얻게 된 심각한 교훈은 과연 그 무엇이겠는가.그것은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한 <정권>이 열번,백번갈려도 변화란 있을수 없으며 반미가 없이는 자주도 민주도 통일도 있을수 없다는것이다.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았기에 민중은 반미자주화와 반파쑈민주화의 기치를 더욱 높이 추켜 든것이다.민중은 반드시 원쑤들로부터 피의 대가를 받아 내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앞당겨 올것이다.
나는 광주사태의 증견자로서 이것을 굳게 확신하고 있다.
1991년 3월8일자 광주의 일간지들은 [3월4일, 광주 5.18항쟁 부상자인 윤기권(광주 두암동)이 위대한 수령님과 참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했다...] 고 평양방송을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 그(윤기권)는 1980년 5.18당시 광주 대동고등학교 3학년으로서 광주 5.18유족회 회장 전계량씨의 아들 전영진(사망)과 동기 동창이었다.
윤기권은 월북전까지 광주시내 모 극장에서 선전간판 그리는 직업을 갖고있었다. 그는 월북하기위해 광주를 떠나기전에 당국에서 2억여원의 광주보상금까지 수령한것으로 확인됐다.....] (월간 말의 1991년 5월호 "5.18 특집기사")
사망자 대부분 M16총상
사망자 검시내용은 대부분이 엠16총상을 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불상(일반총상)
두 사람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광주지검이 최대한 팩트를 중심하여 검시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사, 의사, 군검찰과, 경찰관, 군의관이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총에 맞이 숨졌는지 알 수 없을 경우에는 '일반총상'이라고 했다.
4명의 경찰들(차량사)
경찰들은 4명이 모두 시민군의 차량사에 의하여 죽는다. 이세홍, 정충길, 박기용, 강정용이다. 1980. 5. 20. 두명은 노동청앞에서 죽고, 나머지 두명은 도청앞에서 죽는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20이라 동시에 네 명이 죽는다. 모두 시민군들이 차를 타고 밀어버린 것이다.
박기용
한 경찰관의 사인은 차량사였다. 내용은 데모데원이 운전한 차량에 의해 숨졌다고 적혀있다. 시민군이 죽인 것이다.
조사천(칼빈총상)
독일 기자가 찍은 사진든 아이 아버지의 주인공인 조사천씨도 카빈총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5.18 사이버참배에는 계엄군이 총을 쏜 것으로 되어 있다. 왜곡이 된 것이다.
조사천 씨는 전남대학교 후문 근처에서 건축업을 하고 있었다. 예정 되었던 공사가 며칠 뒤로 미뤄진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령이 확대되고 통행금지 시간이 앞당겨졌다.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간 조사천 씨는 아내 정동순 씨와 함께 처가에 가서 농사일을 돕고 20일, 집으로 돌아왔다. 조사천 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광주교육대학교 정문 앞에서 공수들에게 학생들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뜯어말리다가 공수들에게 맞고 말았다.
이 일에 대한 분노로 조사천 씨는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 21일에는 인부들과 함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가, 계림초등학교 뒤쪽에서 시민들이 몰고 다니던 트럭에 올라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쏜 총을 맞았다. 학생들이 급히 기독교병원에 옮겼으나 손쓸 겨를도 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조사천 씨가 총에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정동순 씨는 그와 함께 나갔던 일행에게서 그가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어디 병원으로 옮겨졌는지 몰라 가까운 개인병원을 뒤졌으나 남편을 찾지 못했다. 다음날이 돼서야 남편을 찾았고, 구묘역에 안장됐다. 다섯 살에 상주가 된 아들 조천호 씨는 매년 5월마다 매스컴에 시달리다가 1998년 6월부터 5·18 묘지에서 일 하며, 광주의 5월이 잊혀가는 걸 안타까워하고 있다. (증언자 : 정동순)
검시는 비교적 세밀하게 구분
이처럼 당시 검시는 계엄군이 참여하여 임의적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5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해서 세밀하게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발간사는 "5.18희생자들의 사망원인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검시조서등을 수록하였습니다"고 했다.
결론
이상 광주지검의 검시는 거의 틀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차량사나 카빈소총사는 시민군들이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카빈소총으로 맞아 사망한 것인가?
전광훈목사의 말대로 시민군이 시민군을 죽였다는 의미이다. 아니면 입증을 해야할 것이다. 시체들의 검시를 보았을 때 시민군은 시민군을 쏘았던 것이다. 전목사의 발언은 사실관계가 충분이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카빈총은 시민군들만이 소지했다. 공수부대가 소지한 적이 없다. 카빈총에 의하여 죽은 사람은 뒤에서 복면으로 무장한 고정간첩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많이 있다. 그들은 복면으로 무장하고 시민군들을 쏘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