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은 섬진강의 강의 동쪽에 자리잡은 지역으로 조영남의 노래에 나오는 화개장터가 있는 유명한 곳이다. 아랫마을 하동사람과 윗마을 구례 사람이 만나며, 광양에서는 삐걱삐걱 나룻배를 타고, 산청에서는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와서 호남사람과 경상도 사람들이 장을 펼치는 곳이다. 이 곳은 영호남의 경계가 없는 곳이다.
실제로 하동은 경상남도이지만 하동 서편의 섬진강을 경계로 전라남도 광양시와 구례군과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경상남도 함양군과 산청군, 동쪽으로는 경상남도 진주시와 사천시, 남쪽으로는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군이 있다.
동쪽으로 진주시와 사천시, 북쪽으로 산청군·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와 접하고, 남쪽으로 남해를 사이에 두고 남해군과 마주하며, 서쪽으로는 섬진강과 통꼭봉(905m)·불무장등 등의 연봉을 경계로 전라남도 구례군·광양시와 각각 접한다.
연혁
하동은 변한 12국중의 하나인 낙노국에 속한 지역으로서 다사성 또는 다사군으로 불리웠지만 통일신라 시대 경덕왕16년(757년) 하동군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는 진부부 하동군이 되었다. 현재 4만 2천명이 살고 있다.
지형
지세는 소백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돌면서 북쪽으로는 지리산과 서쪽으로는 백운산이 맞대어 솟아있고, 남부지역에는 많은 섬과 만을 포용하는 다도해를 이루고 있다.
영호남이 만나는 화개 지역은 높은 산악지대로 토끼봉(1,533m), 영신봉(1,650m), 삼각고지(1,586m), 삼신봉(1,284m) 등 1천미터가 넘는 고봉과 형제봉, 벽소령, 영신봉 등이 즐비하고 지리산을 돌아 남해에 이르는 섬진강은 하동의 젖줄이며 생명선이다.
화개장터
돌비에는 조영남의 노래가사가 새겨져 있다.
화개장터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재래시장으로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남도 구례군과 마주보고 있는 지역적 특성 덕분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교류지점이 되었던 곳이다. 지리산에서 시작한 화개천과 섬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화개장터에는 조영남의 동상까지 만들어져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 한 번 와 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광양에선 삐걱삐걱 나룻배 타고
산청에선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사투리 잡담에다 입씨름 흥정이 오손도손 왁자지껄 장을 펼치네 구경 한 번 와 보세요 오시면 모두 모두 이웃 사촌 고운 정 미운 정 주고 받는 경상도 전라도의 화개장터 (조영남 작사, 작곡, 노래)
이 시장은 영남과 호남간 화합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장터이다. 실제로 이곳 상인들과 소비자들은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섞여 있으며 지역감정 없이 정답게 사투리를 나누는 곳으로 유명하다.
관광지가 되어서 볼 것도 많고 영호남 화합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호남의 격차가 없는 지역이다.
화개장터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많은 사람이 붐볐던 곳이다. 이곳에 5일장이 서자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 더덕, 감자 등을 가지고 와서 팔고, 전라도 구례나 경남 함양 등 내륙지방 사람들은 쌀, 보리를 가져와 팔았다.
그리고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이 장을 놓칠세라 생활용품을 갖고 왔으며, 또한 여수, 광양, 남해, 삼천포, 충무 등지의 사람들은 뱃길을 이용하여 미역, 청각, 고등어 등 수산물을 가득 싣고 와 이 화개장터에서 팔고는 했다.
하동은 지리적 이유때문에 영호남 사람이 화개장터에서 격의 없이 만나는 곳이다. 영남과 호남간 화합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장터이다.
실제로 이곳 상인들과 소비자들은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섞여 있으며 지역감정 없이 정답게 사투리를 나누는 곳으로 유명하다. 관광지가 되어서 볼 것도 많고 영호남 화합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하동은 구한말시절에는 동학농민군으로 인한 피눈물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학농민운동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고성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70년대까지 성이 있었다고 한다.
고성산은 능선 곳곳이 암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자연 암벽들을 연결하여 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산 정상부근에는 동학 농민군 지휘자들이 군사회의를 개최한 듯한 의자 및 탁자 모양의 돌이 남아 있다.
이곳은 조선 고종 31년(1894) 내정을 간섭하는 일본군에 항거하여 봉기하는 서부경남 일원의 농민군 5천여 명과 일본군이 맞서 싸운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일본군 보고서에 나타난 것만 해도 전사한 동학농민군이 186명, 부상자도 수십 명이라 한다. 이 고장출신 인사들이 고성산성 항일전적지보존회를 조직하여 1995년 동학농민운동위령탑을 세웠다.
하동은 일찍이 영호남이 맞닿은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동학교세가 강하였다. 영남과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연대하여 관군, 민보군, 일본군을 상대로 하동 성읍을 놓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하동지역의 대표적인 싸움은 고승당산과 금오산 싸움이다.
고승당산전투(현하동군 옥종면 북방리)는 하동지역에서 가장 큰 전투이다. 고승당산은 해발 185미터의 야산이지만 삼면이 들판이고 서쪽은 낮은 능선과 연결되어 있어서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은 이 정상을 놓고 2시간 이상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중대를 이기지 못하여 패퇴하였다. 고승당산 전투에서 동학농민은 3백여명이 희생했다. 동학이 회의를 했던 당시의 자취가 여전히 남아있다.
하동의 3.1운동
하동은 자체적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하동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3일 하동시장에서 시작되었고, 양보면 출신으로 양보일신학교 교사로 있던 정세기와 정성기, 정윤기의 주도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
적량면장 박치화는 3월14일 돌연 사표를 내고 18일 하동읍내 장터로 나가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박치화의 돌발적인 행동을 바라보던 읍민들과 장터 상인들이 모두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현재 독립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는데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독립선언서로 하동사람들의 독립의지와 저항의식을 진솔하게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치화 등 12인의 이름으로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서울의 3·1독립선언서와는 차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독자적인 지역의 독립선언서라는 점이다. 둘째 비폭력 운동을 명시하고 있다. 셋째 민족자결의 내용을 담고 있다.
‘(중략~)최후의 1인과 최후의 일각까지 폭동과 난거(亂擧)는 행치 말고 인도와 정의로 독립문으로 전진합시다. 어허라, 대한 광복과 동양 친목과 세계평화가 금일로부터 실현되얏소. 분기하고 맹진하라. 우리 반만년 신성한 역사와 삼천리 금수(錦繡)의 강토를 유(有)한 우리의 동포여’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하동의 3·1만세시위는 그 횟수에서 17회나 걸쳐 일어나 경남지역에서는 단연 가장 많은 만세시위가 펼쳐진 곳으로 나타났다. 독립공원을 세우기도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