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 답사기(산청4)

함양. 산청 양민학살사건을 중심으로

편집인 | 입력 : 2023/04/13 [06:01] | 조회수: 307
 

 나의 신앙유산답사기(산청1) 클릭  

 나의 신앙유산답사기(산청2) 

나의 신앙유산답사기(산청3)

  

 

함양. 산청 양민학살사건

 

  

 

함양·산청 학살사건은 1951년 2월 7일 경남 산청군과 함양군 주민이 공비에 협력했다며 국군이 저지른 대량 학살사건을 말한다. 당시 민간인 705 명이 피살당했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7일, 국군이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과정에서 산청군 금서면 방곡ㆍ가현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동강마을, 유림면 서주강변에서 주민 705명을 '통비분자'로 몰아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국군 11사단(최덕신 사단장)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인 "견벽청야"를 수행하면서 무고한 민간인 705명을 학살했다. 

 

 

 

기념비석에는 "여기와 선 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양민들의 영혼을 위해 묵념을 올려야 할 것이다...이 때에 죽은 양민이 고령의 노인과 15세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신고한 인원이 705명에 이른다. 이를 두고 '산청. 함양 양민 학살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양민들은 죽어서 원혼이 되고 시체 가운데서 살아난 요행히 현장을 피해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반세기를 통비분자로 몰려 수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았다"고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당시 47세 였다. 

 

  

 

5살자리 어린아이도 좌익으로 몰려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2살자리 아이도 좌익이라는 이름으로 국군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함양. 산청 학살사건은 한국일보가 제일 먼저 보도했다. 

 

“거창사건이 감행되기 바로 3일과 5일 전인 지난 51년 2월 5일, 7일 두 차례에 걸쳐 경남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에서도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약 800명의 양민이 집단 학살당한 사실이 이제야 알려졌다.” 

 

다음날인 17일에는 동아일보와 부산일보도 산청·함양 학살을 보도했고, 일부 외신도 한국일보 기사를 전하는 방식으로 보도했다. 정부는 늦게서나마 추모공원을 조성하였다.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 묘역 조성과 위령탑 건립은 1996년 1월5일 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와 1998년 2월 17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의 사망자 및 유족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2001년 12월 13일 합동묘역조성사업 착공이후 4년에 걸친 공사 진행으로 준공했다.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을 매년 11월 첫째 주 금요일 거행하고 있다.

 

 

  © 편집인

 

1951년 2월 5일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육군11사단장 최덕신, 9연대장 오익경, 3대대장 한동석)이 실시되면서 오익경과 한동석은 경찰을 포함한 청년 방위대로 편성된 1개 중대 총 700명을 이끌고 신원면으로 진격했다. 기념관에는 산청, 함양 거창사건 주범 부조상이 있다.

 

 

 

신원면에서 적을 확인 할수 없었던 3대대 주력부대는 빨치산은 흔적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 하자 젊은 여성을 무차별로 성폭행하고, 노약자들에게 강제로 군수 물자 등을 동원케 하고, 정보 장교 이종대는 노인, 부녀자 등을 현장에서 총살하는 등, 수복이라는 미명아래 아주 난폭하게 행동했다. 좌익이나 빨치산이라는 증거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같은 백성을 학살했다. 

 

 

 

이 부대는 다음 날인 2월 6일 오전 11시 금서면 수철리에 동 3대대 병력이 이동해 와 주둔하고 작전 준비를 하면서 2월 7일 음력 정월 초이튿날 연합 작전의 대 토벌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산청 방향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제 1진은 산청 방면에서, 제 2진은 함양 유림 방면에서, 제 3진은 함양군 마천 방면에서 포위하여 지리산 주변에 있는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 화계, 주상, 자혜리와 함양군 휴천면 점촌, 유림면 손곡, 지곡, 서주리 등 모든 주민들을 집결시켜 미친 듯이 무차별적으로 남ㆍ녀ㆍ노ㆍ소 어린이를 막론하고 처참한 학살을 감행했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당시 싹쓸이 견벽청야를 주장했던 11사단장 최덕신 장군은 광복군 및 중국 국민당군 출신으로 1951년 거창양민 학살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 시절 독재정권에 반대했으며, 더 나아가 1980년대에 월북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과 서독대사, 천도교 교령 등으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1976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고 결국 1986년 월북했다. 최덕신 장군의 아들 최인혁도 2019년 월북했다.

 

  최인혁과 그의 어머니 류미영 (2000, 8월)


최씨는 평양 도착 후 “가문이 대대로 안겨 사는 품, 고마운 조국을 따르는 길이 곧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언을 지켜드리는 길”이라며 “늦게나마 공화국(북한)에 영주할 결심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윤이상과 최덕신은 남북 양쪽에서 환영을 받은 대표적인 인사들이다. 최 전 장관과 유씨는 월북 후에도 북한 고위직으로 지내다 각각 1989년, 2016년 사망했다,

 

그러나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은 보직도 물질도 얻지 못한 채 살아보지도 못하고 지리산 자락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다. 

 

  

 

  

 

  


이처럼 산청은 피와 눈물이 뒤범벅 된 곳이다. 거창만 양민 학살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산청, 함양에도 대량학살이 있었다. 문익점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따뜻한 솜옷을 입혀주었고, 유의태, 허준을 통하여 백성들을 치료해주었던 곳인데도 말이다.  

 

  



 유의태

 

  허준


그러나 50년 전의 현실은 피로 물들었다. 지금은 단지 과거의 역사로만 머물 뿐이다.  

 

  



100년 이상된 교회

 

산청교회

 

산청에 가면 1908년에 세워진 산청교회가 있다. 현재는 예장통합 소속교회와 고신측 소속교회로 나누어 졌다.    

 

  

 

  


산청교회는 1908년 10월 경 호주선교사가 산청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천극성, 한용호, 최영수등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천극성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출발점이었다. 1910년에는 약 20여명의 교인이 모여 186평을 매입하여 16평의 예배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산청교회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속에서도 애국정신은 계속 불탔고, 1943년에 이르러 아리아 올갠의 대표였던 하태봉 장로가 최초로 장로 임직을 받게 된다. 1958년에 고신측과의 분쟁으로 교회가 둘러 나뉘게 된다. 

 

  


단계 교회

 

단계교회는 1917년에 장사를 하던 황성준씨가 함안읍교회 교인인 김복남씨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주의 사람들과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이 되었다.

 

이미 1915년에 강대현씨가 호주선교사(한국명 권이만)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황성준, 김태영, 이영수 등 몇분이 황성준씨의 사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922년이 되서야 주성태씨가 최초의 사역자로서 활동하였다. 1935년 김점용전도사가 단계리에 교회당을 신축했다.  

 

1937년에 단계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반대로 김봉갑 전도사가 연행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1944년에는 종교탄압이 극에 달해 일제경찰은 신도들의 예배를 금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 때, 공산군의 남침으로 교회당이 불타자, 다른 지역에 교회당을 다시 건축하기도 했다. 이처럼 단계 교회는 일제와 공산당의 침입으로 고난을 겪고 일어난 교회이다.  

 

  

 

단계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상호목사(고신)는 산청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상은목사(예장통합)의 사촌 동생으로서 두 사람 모두 100년 이상된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김상호목사는 앞으로 농촌교회들이 5년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도 한다. 이어 김목사는 단계교회는 역사성이 있는 교회로서 단계읍에서 모범이 되는 교회로서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100여년 이상된 교회들이 문익점의 목회씨앗 이상으로 영적인 복음의 씨앗을 제공해 주어 산청을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고 있다. 교회부터 3.1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타종을 함으로서 산청교회는 항일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고, 유의태와 허준처럼 일제와 공산당치하에 수많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영적 병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산청은 유의태, 허준의 영향으로 한방산업이 발달해 있다.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이후, 산청은 한방제약산업단지가 2014년에 시작하여 2018년에 준공을 마쳤다. 306,904㎡ 규모로 조성되었다. 

 

 

 

 

  © 편집인

 

 



  

 

경상남도는 전국 한방, 항노회 기업체를 대상으로 한방산업제약산업단지에 투자의향이 있는 기업체를 유치하기도 했다. 

 

  

 

2023년 9월에는 국제 항노화 엑스포까지 개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약 200만 명이 다녀갈 것을 예측하고 있다. 

 

  


이외에도 산청군은 금서농공단지를 조성하여 2,000여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그리고 산청군의 신규주택 공급량이 대폭 늘어나 정주·생활여건 개선은 물론 인구유입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과 경호강 등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은 물론 산청IC, 생초IC, 단성IC 등 사통팔달의 교통망, 경남 미래 먹거리인 한방항노화 바이오 산업의 중심지라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공동주택 건축·인허가 신청이 활기를 띠고 있다.

 


산청에는 농경이나 한방산업뿐만아니라 항공우주산업도 발달해 있다. 산청이 더이상 유의태나 허준의 약초만 캐는 곳이 아니다. 비행기 날개도 만들어 하늘의 산업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하늘의 복음이 들어갈 때 하늘의 산업이 발달하게 되어 있다.  

 

  

 

KAI에서 생산된 구조물은 2025년까지 11년 동안 항공기 제작사인 유럽 에어버스사에 납품된다.

 

KAI는 유럽 에어사로부터 1조3500억원 규모의 A320 계열 항공기 날개 하부구조물을 수주했으며, 2013년 산청군 금서면 금서제2농공단지내 사업장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생산된 구조물은 2025년까지 11년 동안 항공기 제작사인 유럽 에어버스사에 납품된다.

 

  

 

  


산청의 인물

산청의 인물 중에 문익점, 성철스님, 윤이상이 있고, 정치가로는 박계동, 스포츠인으로는 베트남의 영웅 박항서가 있다.

 

박항서

 

박항서는 한양대학교 축구부 출신으로서 2002 한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아 월드컵 4강 진출에 공헌했고, 2017년부터 2023년까지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그는 선수로서는 괄목할만한 업적이 없었으나 감독으로서는 성공한 사람이다. 

 

  


박항서는 아시아에서도 축구 약체로 분류되던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맡고 난 이후부터, 2018 AFC U-23 아시안컵(준우승)에 이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4위)에서도 마찬가지로 매 대회마다 팀의 역대 최고 성적을 경신, 베트남 남자 축구에서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웠다.

 

2018년 동남아 축구연맹 대회인 스즈키컵도 10년 만에 우승시켰고, 직후 2019 AFC 아시안컵에서는 8강에 올랐다. 2019년 동남아시안게임(축구팀은 22세 이하 대회. 각국 올림픽위원회 연합 주관)에서 60년만에 우승을 달성했다. 그는 산청에서 목화씨앗이라기 보다는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결론 

 

산청은 지리산으로 둘러싸여 맑고 깨끗한 산이 있는 곳으로 청정한 공기와 물이 어우러진 곳이다. 산청이 없었더라면 솜옷을 입을 수 없었고 따뜻한 겨울을 날 수가 없었다. 산청의 문익점의 목화씨 한 알이 온 민족을 따듯하게 만들었다. 

 

  


목회씨는 솜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솜을 주는 귀중한 씨앗이었다.  

 

  


허준과 유의태는 가난한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어 치료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산청은 백성들에게 따듯한 옷을 입혀주고.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해주는 치유의 고장이었다. 반면 국군들의 대량 민중 학살로 인해 아픔도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고장에 복음의 씨앗이 들어오자, 산청은 항일운동이나 6.25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주로 산과 밭을 의존하는 가난한 백성들이 받은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크다. 

 

그러나 산청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은 산청의 정신과 삶을 토대로 예수의 따뜻한 영적인 기운으로 산청이 한층 발전할 수 있었으며, 교회를 통하여 산청인들의 아픔이 치유되기도 했다.

 

2023년 산청은 국제 엑스포를 개최할 예정에 있다. 더이상 피와 눈물의 산청이 아니다.

 

산청은 하늘의 복음을 받아들이자 하늘의 산업까지 할수 있게 되었다. 특히 박항서라는 인물이 태어나 그를 통하여 동남아에서 대한민국의 국위가 선양되는 놀라운 역사가 발생했다. 산청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졌을 때, 문익점의 목회씨앗보다 더 큰 값진 결과를 내었다.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