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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은 백성에게 따뜻한 옷을 입힌 선비였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정치인들은 백성보다 자신들이 따뜻한 옷을 입기 원하고 있다. 성직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신도들보다 자신들이 더 따뜻한 옷을 입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문익점은 자신보다 백성들이 더 따뜻한 옷을 입기를 원했다.
문익점이 가져온 10개의 목화씨앗을 산천군 단성면에 심었는데 오직 한 개만이 싹이 나서 재배에 성공하였다.
5개의 씨앗 중에 한 개의 씨앗을 성공시킨 것은 정천익이었다. 그는 베틀을 제일 먼저 만들기도 한 사람이다. 문익점의 장인이 역사를 바꾸었던 것이다.
정천익은 산청에서 부양을 했다. 문익점은 가져왔고, 정천익은 부양시켰다.
그래서 산청의 꽃은 목회꽃이다.
하사와 병장이 부른 목회밭은 산청의 목화밭을 말한다. 한 남녀가 처음 만난 곳이 목회밭이었다는 가사이다. 그러나 문익점과 정천익이 없었다면 목회밭에서 한 남녀간의 사랑은 꽃피우지 못하였을 것이다.
겨자씨만한 목화씨가 뿌려져서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안겨줄 때까지 23주간이 걸린다. 즉 적어도 6개월이 걸린다.
씨앗을 밖으로 빼내면 실뽑기 작업을 한다.
모시는 저마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모시는 마직물이다. 마의 줄기를 벗겨 가늘게 쪼갠후 이은 실로 만든 직물이다.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실로 제작한 직물이다.
삼베
삼베 또는 베는 삼실로 짠 피륙이다. 삼 줄기의 인피섬유를 이용해서 짜며, 표백하면 상하므로 특유의 누런 색상 그대로 사용한다. 뻣뻣하고 신축성이 적으며 잘 늘어나지 않아서 오늘날에는 수의 외에는 옷감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질기고 물에도 강해 로프·카펫·구두나 가방을 만들 때 쓰는 바느질용 실, 침구류 등에 사용된다.
산청의 파리장서 운동
산청에 가면 파리장서기념탑이 있다. 이는 유림들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파리장서는 1919년 3·1운동 직후 전국 유림대표 곽종석(1864~1919)·김복한(1860~1924) 등 137명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도 불린다.
1919년 3.1 운동이 전개되던 와중에, 유림들은 기미독립선언서에 참여하지 못한 사실을 아쉽게 여기고 있었다.
유림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유림들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로 하여 이 독립청원서를 파리로 전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므로 파리장서운동은 유림들의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다.
독립청원서 서명에 참여한 유림들은 김창숙, 곽종석, 김복한 등 호서와 영남지방의 유림 137명이었다.
이 장서를 작성한 사람이 산청출신의 곽종석이었다.
면우 곽종석의 증손자가 여진히 살아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고 없더라도 자손돌이 잘 섬겨받아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도 마음도 전력투구를 하라는 유언을 하셨다"고 했다.
면우 곽종석 선생은 파리장서를 한 줄씩 오려내어 짚신 날에 감추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가져가도록 했다.
그러나 파리 장서 사건은 같은 해 4월에 성주군의 3.1 만세운동에 연루되었던 송회근이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탄로났으며, 파리 장서 사건에 관련된 유림들이 옥고를 겪었다.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했던 곽종석 선생은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출신으로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을 계승한 영남 유림의 영수다. 붓과 글로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을사늑약 체결 반대 투쟁에도 앞장섰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들의 출신지 분포를 보면 경북이 62명(44.6%)으로 가장 많았고, 경남 42명(30.7%), 충남 18명(13.1%), 전북·전남 각 4명(2.9%) 등으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 경상남북도를 합한 경상도 출신 유림은 104명으로 전체의 75.2% 달한다.
2019년에는 파리장서 100주년 기념식이 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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