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벌이를 위해 독일로 떠난 사람들
한인들의 독일로부터 외화획득을 위하여 1963년부터 1970년까지 8,000여 명(7396명)의 광부들과 1만여 명의 간호여성들이 독일로 떠났다. 그들은 부지런함과 근면으로 독일사회에서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1963년 12월 21일 오전 11시께 에어 프랑스 707편이 김포공항에서 이륙했다. 비행기에는 광부 123명이 타고 있었다. 광부들은 19시간을 날아 한국시각 22일 오전 5시 독일 뒤셀도르프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아돌프 광산과 함본탄광에 나눠 배치됐다.
광부와 간호사들로 시작된 독일 이주민
한인의 독일이주는 광부와 간호사들로 시작이 되었다. 이들은 고국에 외화를 벌어다 준 애국자였다. 2008년 9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1965년에서 75년까지 10년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온몸을 던져 일궈 고국에 송금한 외화가 1억 164만 달러가 넘는다고 밝혔다. 연평균 1천만 달러 수준으로 1967년 대비 GNP의 1.6퍼센트에 육박하는 수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매일 쇠기둥 붙들고 울기도 했다.
독일로 떠난 간호사들
파독 간호사의 역사는 45년 전인 1965년 카톨릭 계통의 간호학생부터 시작된다. 이후 1966년부터 1971년에 걸쳐 간호사들의 대부분이 유입됐다. 파독간호사들 중엔 장녀가 많았다. 그들은 동생들과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갖고 열심히 일했고, 매달 수입의 90%를 한국으로 송금했다.
그 당시만 해도 15일을 한 병원에서 일을 하면 다른 도시에서 15일을 일할 수 있을 만큼 독일의 간호사 숫자가 부족했고, 그만큼 일자리가 많았다.
1966년 1월 한국의 간호사들 1진이 독일 푸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간호사의 파독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이수길 박사이다.
중개인 이수길 박사
그는 독일병원의 의사였다. 이박사는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독일 마인츠에서 소아과전문의로 명성을 떨치며 의료계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한독 교류에 크게 기여해왔다.
이박사는 67년에는 자신이 독일로 데려온 간호사들에게 체코 프라하에서 북한의 선전물이 배달된 것과 관련, 독일에서 강제 연행돼 중앙정보부에서 한달가량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당하고 풀려났다.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의 일원으로 지목돼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동백림 사건과 윤이상, 이수길
동백림사건(동베를린사건)은 중앙정보부가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 사이 7차례에 걸쳐 발표한 사건으로, 독일, 프랑스 등 유럽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학생, 문화예술인들이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했다는 사건이다.
이와같이 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은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의 반정부 간첩단사건으로 당시 한국사회는 물론 유럽한인사회를 폭풍의 한가운데로 몰고 간 사건이다. 재불교민들도 16명이나 연루되어 있어, 프랑스 한인사회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빠질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 시절의 공안 사건이다. 동백림(東伯林)은 동베를린의 한자 음차이기 때문에 '동베를린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중정은 서유럽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과 유학생 가운데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음악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노가 간첩으로 지목되었으며, 시인 천상병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고, 고문을 당했다.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현 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은 관련자 임석진(당시 34세, 철학박사)이 귀국하여 자수함으로써 처음 밝혀졌다.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북한은 1957년부터 비교적 통행이 자유로운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대남공작 경험자인 박일영을 동독대사에 임명하였다. 또한 조선노동당 연락부 대(對)유럽공작총책인 이원찬을 상주시키고 막대한 공작금을 동원하여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재학 중인 유학생 및 각계각층의 장기체류자들에게 공작을 시작하였다.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간첩죄) 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하여 조영수, 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 강빈구, 윤이상, 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반공법 제5조 제1항 소정의 회합, 통신, 금품 수수 등 죄의 성립에 있어, 그 상대방이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이면 되는 것이고, 범죄의 주체에 관하여 반국가단체의 비구성원이거나, 지령을 받지 아니한 자임을 요건으로 한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 상호간에 위와 같은 행위를 한 경우에도 이 죄가 성립한다고 할 것이다.
(출처 : 대법원 1968. 7. 30. 선고 68도754 판결 [국가보안법위반·반공법위반·간첩·동미수·외국환관리법위반] > 종합법률정보 판례)
그러나 대법원 최종심에서 간첩혐의로 유죄판결 받은 사람은 없었다.
피고인과 공동피고인 갑이 다같이 북괴의 지령을 받아 가지고 입국해 있던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친구이자 다같이 대학강사이었으므로 직장과 가정에서 예사로이 만날 수도 있었던 처지이었음이 기록상 명백함에 비추어 두 피고인의 회합이 북괴의 지령사항 수행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단순히 친구로서 만나기만 한 정도의 것이었다면 회합이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 할 수 없을 것이니 그 행위는 반공법(폐) 제5조 제1항의 회합죄를 구성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윤이상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간첩죄) 외국환관리법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여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 간첩은 아니었지만 국가보안법, 반공법을 위반하였다.
윤이상과 김정숙
전광훈목사의 비판
이수길 박사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면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수길박사의 덕으로 10년 동안 서독에 진출한 간호사와 간호보조원은 1만여명에 이르렀다. 그 중 5,000명은 독일에 남고, 1,000여명은 미국과 캐나다, 4,000명만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월급은 독일이 한국에 비해 3.5배나 높았다.
한인사회의 모체는 광부와 간호사들
파독 간호사와 이보다 몇 해 앞서 진출한 광부들이 현재 독일 교포사회를 이루는 모체가 됐다. 이들이 한인사회의 모체가 될 줄은 몰랐다.
1966년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스물여섯 살에 독일로 간 민춘강씨(65)는 “한국 간호사들은 독일 간호사 2~3명 몫을 해내서 의사와 환자에게 인기가 있었다. 능력이 뛰어나면 독일 간호사들도 비로 인정해줘 큰 불편함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간호사와 광부의 결혼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가 1만32명. 광부와 결혼한 간호사가 약 8백여명에 이른다.
독일에 도착한 간호사들
그들은 20대의 애띤 모습이었다.
시체도 닦은 간호사들
파독 간호원들은 간호업무뿐만아니라 간병인역할까지 수행하는 고된 일들을 하였다. 간호사 김숙화씨는 심지어 시체닦는 일까라지도 했다. 간호사들은 간병인업무까지 해야 했다.
김씨는 신생아실과 신경외과에서 근무했는데, 43년이란 긴 기간 동안 딱 3번 시체 닦는 일을 해보았으며 정말 두렵고 떨렸다고 했다 그녀는 . 간호사로서 해야 하는 모든 걸, A부터 Z까지 다 해보았다고 했다. (출처 : 시니어매일(http://www.seniormaeil.com)
그러나 고된 근무속에서도 항시 친절함과 성실함을 잃지 않아 간호사들은 독일사회에서 항시 인기가 있었고 독일 일간지에도기사화되었을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독일남자들의 인가를 끌어 미혼녀 80% 정도가 독일 남자들과 결혼을 하게되었다.
파독 간호사도 광부와 같이 최초 3년 계약을 맺었다. 이들은 진출 초기에는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로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환자를 정성껏 돌보고 부지런히 일해 의사들의 인정을 받았다.
필사적으로 일했던 한국 간호사들은 점차 독일 병원에서 인정받는다. 그 친절함과 성실함이 널리 알려져 환자들은 한국 간호사를 환영했고, “주사를 언제 놨는지 모르게 순식간에 놓는다.”는 소문이 퍼져 한국 간호사들에게 주사를 맞고자 늘어선 줄이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는 단기 계약이었지만 한국 간호사들을 놔 줄 마음이 없었던 독일 병원들에 의해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 체류는 길어만 갔다.
의사가 된 간호사
한국간호사들의 좋은 이미지로 독일 의사와 결혼하는 간호사들도 더럿 있었으며 독일남자들과 결혼하는 사례가 많이 있었다.
“심지어 독일 간호사들이 ‘한국 간호사들이 우리 독일남자들 다 뺏어갔다"고 할 정도였다.
간호사업무를 마치고 독일 의사가 되는 간호사들도 있었다.
정작 그를 힘들게 했던 건 허드렛일이었다. “밥을 나르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게 힘들었어요. 동생들 기저귀 한번 갈아보지 않았거든요. 철이 없을 때니까, 변기 들고 다니는 게 고역이었고 창피했어요. 외국까지 와서 식모보다 못한 것 아닌가… 제 신세가 처량했어요.”
당시 독일의 간호사는 의료 전문인력보다는 실업학교를 나온 기능 인력으로 인식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녀는 공부를 하기 시작하여 당당하게 독일의사자격증을 따 독일에서 의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이에도 여러 명이 있다. 한인들은 공부할 여건만 주어지면 어디를 가든지 어학만 극복하면 전문인들이 될 수 있었다.
비자연장과 독일의 경제난
그러나 파독간호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일을 할만하니 비자기간이 다다르면서 국내로 귀국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72년 이후로 독일에 오는 간호사들이 줄어들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노동조합의 노력으로 간호사 급여수준이 좋아지고 자국인들이 간호사가 되겠다는 숫자가 늘어나서 더 이상 외국인 간호사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1974년 석유파동 후 독일의 경제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에서 근무하고 있던 외국인 간호사(한국, 인도, 유고, 필리핀, 아프리카)들을 그들의 나라로 되돌려 보내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때 한국인 간호사들 중 일부는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했고 일부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간호사들의 좋은 이미지로 독일정부는 유독 한국 간호사들만 더 체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파독광부들의 정체성
파독광부들은 초기에는 고졸 이상 대학생 등 고학력자가 많았고, 그 이외에도 사업가 군전역자들이 많았다. 당시 광부지원자는 15대 1일이 되었을 정도로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월급은 평균 650-950 마르크(13만원-19만원) 였다. 이는 한국의 직장인 월급 8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1차 1진이 분산배차된 광산은 아헨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에 60명, 뒤스부르크 함본탄광에 63명이 배치되었다.
1964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함본광산을 방문하기도 했다.
파독 기술자들
파독광부와 간호사이외에도 기술자들은 1971년과 1972년에 세차례에 걸쳐서 약 300여 명이 독일 함부르크 시에 있는 호발트 조선서와 3년 근로계약을 체결하면서 이루어졌다. 3년 노동계약이 완료된 이후에는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와 조선업계에서 일을 하였다.
1970년초반에는 파동광부와 간호사들 약 800여 명이 결혼을 하면서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재 독일의 한인은 약 3만 여명이다. 대부분 광부와 간호사 출신이다. 그들은 재독한인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한인교회
최초의 담임목사 이영빈
당시 독일 개신교 복지재단이 괴팅겐 신학대학에 있었던 한인 유학생인 이영빈 목사에게 한인을 위한 예배를 주관하도록 요청했다. 이영빈목사는 감리교 목사로서 1955년 미리 독일에 되서 유학생신분으로 공부룰 하고 있었다.
광부로 파송되었던 기독교인들이 이명빈목사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한인교회 최초로 복훔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영빈목사가 여러 군데 기도처를 다니면서 순회목회를 하였다.
이명빈목사는 1965년 라인주교회의 다아코니아로부터 정식 한국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었다. 이목사는 영적 인도도 하였지만 당시 노동자들의 인권문제, 비자문제 등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진보적 목사
그러나 북한을 왕래하는 등 하여 요주의 인물이 되어 한국에는 귀국조차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독일에 있었던 진보적 목사와 지식인들은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면서 조국 통일이라는 미명하에 북한을 자주 왕래하면서 이적행위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한국기독교협의회(KNCC)에서 파송한 장성환목사가 뒤스브르크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 한인을 위해 활동했다. 이처럼 독일의 한인교회는 미국과 달리 진보단체의 목사들이 한인을 상대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우후죽순으로 설립되는 한인교회들
1972년에도 한인간호사와 광부들이 있었던 푸랑크 푸르트,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에서 한인교회들이 설립되었다. 특히 교회에서 비자가 만료된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인권과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송환반대 투쟁
파독 간호사들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 중의 하나는 1977년 불붙기 시작한 강제 송환 반대투쟁일 것이다. 독일에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외국 인력을 송환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한국 간호사들은 베를린에서부터 시작하여 독일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서명 운동을 벌여 나갔다.
조국남 재독한국여성모임 대표는 “독일 병원이 필요해서 불러놓고는 정작 경제가 어려워진 뒤 가장 먼저 해고하는 건 외국인 노동자, 그 중에서도 약자인 여성노동자라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다”고 회상했다.
독일 전역에서 일하던 간호사들은 똘똘 뭉쳐 강제소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독일인 동료들과 연대해 서명운동을 펼치고 집회를 열어 독일정부에 공개질의를 했다. 결국 1978년 독일 정부는 이들의 체류와 노동을 허가했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다"며 독일 당국과 논쟁을 벌인 한국 간호사들의 당찬 모습에서 독일인들은 스위스 출신 작가 막스 프리슈의 독일 이주노동정책 비판 문구를 떠올렸다고 한다. “노동력을 불렀더니, 사람이 왔네(Wir riefen Arbeitskräfte, und es kamen Menschen)”
이는 독일 전역으로 번졌고 한국인 간호사들은 그들을 지지하는 독일 시민들과 연대하여 마침내 1978년 사실상의 무기한의 노동권을 따냈던 것이다. 이영빈목사를 비롯한 독일 한인교회의 역할이 컸다.
정하은 박사, 베를린 한인교회 목회
다른 한인 교회에서는 1973년 파독광부 간호사가 모여서 예배를 시작했다. 한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예배부터 시작을 했다. 교회는 한인들의 정신문화의 산실이자, 독일의 주류사회로 들어갈 수 있는 디딤돌로서 역할을 하였다.
교회와야만 한인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고된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다. 이처럼 교회는 정신적인 치유의 장이자, 독일사회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고, 이민을 이한 정착지로서 역할을 했다.
1963년 한국 광부들이 루로 지역의 강산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1966년에는 한 지역에 약 2,500여명의 한인광부들이 정착하였다. 1966년에는 한인 간호서 1227명이 이 지역을 포함한 인근지역에 이주하게되었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기도모임을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에 가야만 그나마 한인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한인교회가 설립된 70년대 초기에는 성탄축하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한인들은 이주초기부터 예배로 시작하였던 것이다.
1970년에는 재독 기독연합총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한인들은 교회가 유일한 교제의 장소였다. 교회는 한인들끼리 교제를 하면서 독일사회에 대한 정보도 얻고, 독일사회로 진입하는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한인교회가 성장하면서 성가대도 조직하였다. 독일에 거주하는 유학생들이 교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음악 기량도 발휘하고, 영적인 도전도 받았다.
독일교회는 진보교회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특히 70년대 독재정권 당시 민주화의 장소이기도 했고, 한국과 달리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치외법권지역이기도 했다.
현재는 약 130여개의 독일 한인교회가 존재하여 한인사회의 모체로서 작용하고 있다. 더군다나 독일이 루터교가 중심되는 개신교국가이기 때문에 독일정부가 볼 때 한인교회를 우호적인 단체로 보기 때문에 교회를 통하여 주류사회와 교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독일 본한인교회는 1969년에 광부와 간호사들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가는 세월
20대 때 앳띤 모습으로 독일 땅을 밟았던 간호사들은 어느듯 세월이 흘러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이미 그들의 손녀가 젋었을 때의 그들을 연상하게 하였다.
http://www.lawtimes.net/4074 나의 신앙유산답사기(독일편)
http://www.lawtimes.net/3910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하와이편)
http://www.lawtimes.net/3912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하와이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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