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리적 여건
경상북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영주시는 해발 약 200m로 소백산 산록 고원부지에 형성되어있으며 동쪽으로는 봉화군, 서쪽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남쪽으로는 안동시와 예천군,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소·태백권 교통의 중심도시이다.
2. 교통적 여건
경북 북부 지역 철도교통의 중심지로서 시내에 있는 영주역에서 중앙선, 영동선, 경북선이 교차한다.
대한민국 철도청 시절에는 전국에 5개밖에 없었던 지방철도청이 자리잡기도 했다. 현재는 코레일 대구경북본부라는 명칭으로 있다. 과거 철도로 번성한 도시였지만 경상북도가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통하는 남부지역을 발달시키면서 영주시가 속한 경북 북부는 발달 동력이 없어지면서 낙후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도시가 많이 쇠퇴했으며 번성의 계기가 된 철도는 도심을 이리저리 관통하며 찢어놓아 도시 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여론이 높아진 상태이다. 철도 초강세 지역이었다. 중앙선을 중심으로 경북선과 영동선이 만나다 보니 철도만으로도 지금의 도시 규모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철도와 도로가 엎치락덮치락하고 있는 상태인데, 2021년 1월 5일을 기해 청량리~안동 구간에 우선적으로 KTX가 개통되면서 청량리~영주 간을 1시간 40분에 오고 갈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말에 중앙선 복선화가 완료되면 청량리 방면 KTX의 증편과 증속은 물론, 동대구, 태화강, 부전방면으로도 KTX가 다닐 예정이기 때문에 다시 철도가 강세를 보일 전망이다.
특히 영주는 정신문화의 서원의 도시이기도 하다. 한국의 서원은 400여 년을 지속해 온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 자산이자, 정신문화의 산실이자 예학의 산실이다.
나아가 겸손과 절제를 추구하는 선비정신과 자연과 더불어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하며 학문연구를 통해 인류애를 실천하고자 한 자아 성찰과 자기 고뇌의 현장이다.한국의 서원은 현재 600여 개가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서원은 학식과 인품이 있고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원칙을 지키는 삶을 살아온 선비들의 배움터.“불의에 굴하지 않고 학문과 덕을 쌓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올바른 길만을 걸어가겠노라” 라는 정신문화가 고스란히 덮여있다.
우리나라 선비는 서원문화를 만들어낸 지성인들로서 학식과 인품이 있고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원칙을 지키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서원을 통한 ‘선비정신’이야 말로 우리나가 지성인들의 문화이다. 그런 선비를 길러내는 역할을 하던 곳이 바로 ‘서원’이었다. 서원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선현에 대한 제사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육의 기능이었다.
3. 문화와 역사
소수 서원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가면 소수 서원이 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영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랜드마크 중 하나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으로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유학자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세웠다.
이듬해 1543년(중종 38) 사우(祠宇)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을 마련하여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대체적인 골격이 이루어졌다.
안향(安珦 1243-1306)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최초로 성리학(주자학)을 도입하여 실천적 유학을 전파한 우리나라 성리학과 선비정신의 시조이다.
그의 사상은 제자인 육군자(권보·우탁·이진·이조년·백이정·신천)를 거쳐 이색·정몽주·이황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도학의 학맥을 형성시켰다.
그는 고려 후기 무신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던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에 의한 명분주의,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 등의 특성을 지닌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으며, 이러한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양성을 통하여 이룩하려 하였다.
또한 그의 제자 추적(秋適)은 『명심보감』을 편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유가사상에 기반한 인성교육 체계를 만들었다.
영주 소수서원의 본래 명칭은 백운동 서원이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던 것이 시초다. 풍기 군수의 퇴계 이황의 요청으로 1550년(명종 5) 소수서원이라 사액(賜額)을 받았다.
사액서원이 되면 왕의 친필 현판, 서적, 노비, 면세, 면역 등 그 혜택이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하기 때문에 소수서원 이후 세워진 전국의 서원들은 경쟁적으로 사액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뛰어난 유학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초기 서원들과 달리 나중에 생겨난 서원들은 이러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림파의 세력 형성, 확장의 목적이 주가 되었고 이로인해 서원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나중에 서원철폐론이 등장할 무렵에는 무려 1,000여개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정치를 잘했던 숙종은 사액을 남발하면서 130개가 넘는 사액서원을 만들기도 했다.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서원이며,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부석사
유교문화이외에도 영주는 불교문화기 일찌감치 발전했던 곳이기도 하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 되어있다.
부석은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바위다. 아래 위가 붙지 않고 떠 있다고 해서 뜬돌, 즉 부석(浮石)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사찰이름으로 따와서 사용하게 됐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여래좌상은 국보 제45호다. 형태상으로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불상이다.
이처럼 영주는 천년의 고찰을 사랑하며 유교운동이 펼쳐져 한국의 정신문화가 담겨진 곳이다.
4. 영주의 인물
정도전
영주출신 중의 인물은 정도전이 있다. 그는 호남 나주에서 유배상활을 하였지만 이씨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영주출신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 충혜왕부터 조선 태조시대를 거쳐간 사람으로서 조선왕조의 이론적 체계를 마련했다. 호는 삼봉(三峰)이고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아들로 영주의 구성에서 태어났다. 이색(또는 진중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정몽주·이숭인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강론했으나, 권신 이인임의 세력에 맞서다가 나주로 유배되었다. 정도전은 나주유배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정도전은 이곳 유배지에서 고려의 가장 천대받는 민초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특히 우연히 밭갈던 농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요즘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을 살피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는 농부의 질책을 들은 정도전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정도전의 유교적 민본사상은 단지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유배지의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이 점에서 정도전은 개경의 귀족들과 사대부들 사이의 권력 게임의 장소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게 된다.
왕의 나라가 아니라 백성과 신하가 중심이 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고려라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성혁명이다.
역성혁명은「성씨(姓氏)를 바꿔 천명(天命)을 혁신(革新)한다.」는 뜻으로, 덕 있는 사람은 천명(天命)에 의해 왕위에 오르고, 하늘의 뜻에 반하는 사람은 왕위를 잃는다는 고대 중국의 정치 사상이다.
1383년(우왕 9년). 정도전은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미 역성혁명이라는 목표를 세운 정도전에게는 무엇보다도 혁명을 완수할 힘, 즉 군사력이 필요했다. 정몽주로부터 이성계의 이름을 전해 들은 정도전은 이성계를 직접 살펴보고 싶었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에 감탄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원대한 포부에 감탄했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이 정도 군대라면 무슨 일이든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본다. 이성계가 놀라서 "무슨 뜻이냐"며 반문하자 정도전은 남쪽의 왜구를 소탕하는 얘기라고 둘러댄다.
이성계와 헤어지고 난 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영 앞에 서 있던 소나무에 다음과 같은 시를 새겨 놓는다.
"아득한 세월 속에 한 그루 소나무여
여기서 소나무는 이성계를 의미한다. 앞으로 때가 되면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자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이 날은 바로 고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두 경계인이 만나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의지를 확인한 날이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손을 잡았다. 그래서 역성혁명을 하기 위해 위하도 회군을 하였던 것이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손을 잡고 516혁명을 한 것과 같았다. 역성혁명은 고려시대의 쿠데타였다.
이처럼 역성혁명은 영주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훗날 제2역성혁명은 구미 출신 박정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훗날 영주출신 강신명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
500년의 유교와 1000년의 불교문화를 떨쳐버리고 예수를 통한 역성혁명을 이루고자 했다. 예수를 통한 역성혁명이 영남을 바꾸어 버렸다. 경안신학교 출신 중에 총회장이 14명이나 출현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 건국의 기틀을 다지고 한양도성과 경복궁 건설의 초석을 놓았다. 왕의 나라가 아닌 선비와 백성의 나라를 꿈꾸며 불교를 배척하고 재상중심의 정치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이방원과의 대립으로 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되었다. 그는 『경제문감』, 『불씨잡변』, 『심문천답』, 『심리기편』, 『조선경국전』 등을 남겼다.
이외에 영주의 인물로는 강신명(전 새문안교회 목사), 강경식(전부총리), 홍사덕(전국회의원), 황영시(전육군참모총장) 등이 있다.
예수를 통한 역성혁명
영주는 혁명의 도시이다. 영주는 일찍부터 복음이 전파되었던 복음을 통한 역성혁명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경북 영주 강동리에 도마석상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도마의 한국왕래가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바위에 히브리어로 도마(자음)라고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도마 바위 하단에는 도마의 슬리퍼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경북 영주에 있는 도마의 바위를 방문하고있다.
바위에는 "땅끝까지 간다"는 뜻으로 '지전행'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연고로 인해 조국현 이사장은 한국 대구에서 도마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내매교회와 인물들
영주에서 가장 오래된 내매교회의 설립자는 강재원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교회를 세우기 전 대구에 살았는데, 그 곳 약령에서 미국선교사 배위량의 전도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대구지역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다니다가 1906년(고종 43년) 내매마을로 돌아왔다.
고향에 오자마자 그는 유병두라는 사람의 사랑방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자신의 집에 십자가를 달고 예배처소를 만들어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 내매교회의 시작이었다. 경북북부에서 설립된 최초의 교회였다. 초기에 부흥사 길선주, 김익두 목사 등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여는 것은 물론 개화운동과 신농법 교육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내매교회는 강씨집안으로부터 설립되어 한국사회에 거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내매교회를 목회한 강병주목사의 아들인 강신명 목사도 내매교회에서 활동했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선진국으로 진입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삼상반도체도 내매교회의 교인에 의하여 시작이 되었다.
강신명 대구의 계성중학교를 거쳐 1934년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8년에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본과를 마치고 1940년에 일본의 동경신학교에서 수학한 제2의 한경직이었다.
8·15광복 후 강신명목사는 1953년에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神學校)에서 교회사분야의 신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64년에는 목회와 교육사업의 공로가 인정되어 미국의 스털링대학(Sterling大學)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당대 한경직목사와 함께 최고의 영적 지도자이자였다. 그를 통한 영적 혁명은 대단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시절, 민주주의를 탈환하기 위해 반독재투쟁을 하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조상부터 정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 새문안교회에는 강신명목사의 정신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가 되었다.
내매교회
이처럼 영주는 강씨집안이 선교사들을 통하여 예수를 받아들여 예수를 통한 역성혁명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주에 가면 내매교회가 있다. 내매리는 영주시에 속해 있지만 봉화에서 20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여기에 116년된 내매교회가 있다.
내매교회가 배출한 인물들
내매교회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건 교회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목회자로는 영락교회를 공동설립하고 새문안교회에서 24년간 목회활동을 한 강신명 목사, 계명대학교를 설립한 강인구 목사, 창신대학교 강병도 학장 등이 이 교회 출신이다. 또 강진구 삼성반도체 회장, 강신주 삼성전자 사장 등 기업인 10여명도 배출했다.
특히 삼성 반도체 신화의 초석을 깔았다고 평가받는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은 1927년 경북 영주(내매)에서 출생했다. 강 전 회장은 대구사범학교와 서울대 전자과를 졸업하고, KBS와 미8군 방송국에 근무했다. 이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이사를 거쳐 1973년 삼성전자 상무를 시작으로 ‘삼성맨’이 됐다.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전 회장의 신뢰를 받았던 강 전 회장은 이후 삼성전자 전무, 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삼성전자 회장 등을 거치며 ‘전자업계 산증인’으로 불렸다. 박성배 씨는 “강 회장은 1970년대에 벌써 휴대폰을 구상한 전자업계 선구자이셨다”며 “되돌아보면 스티브잡스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오늘의 삼성전자가 있기까지 내매교회 출신의 강진구 회장이 있었다.
내명학교
내매교회는 최초의 사립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내명학교이다. 사립내명학교는 강신명목사의 아버지인 강병주, 강석진 목사가 주축이 되어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설립한 학교다.
경북 북부지방에서는 최초의 기독 사립학교였고 순흥학교와 풍기학교에 이어 영주에서 세 번 째 초등학교였다. 기독내명학교는 100년 세월 복음의 꽃 피운 내매교회(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부설 사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그야말로 내매교회는 신앙과 교육을 통하여 사회를 바꿀만한 역성혁명을 이루었던 교회이다. 삼성반도체는 한국을 G20 국가로 성장시키는데 동력의 역할을 한 역성혁명의 모티브가 되었다. 내매교회는 영주시골의 작은 교회이지만 이 교회를 통하여 한국교계과 사회를 변혁시킬만한 인물이 많이 탄생되었다.
http://www.lawtimes.net/3698 (예천)
http://www.lawtimes.net/3693 (영양)
http://www.lawtimes.net/3696 (청송)
http://www.lawtimes.net/2839 (안동)
http://www.lawtimes.net/2947 (안동2)
http://www.lawtimes.net/2948 (안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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